1621년 慶尙道安東府의 河回마을에서 실시된 洞契의 座目으로 45명의 洞員 명단을 수록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安東府의 河回마을에서 실시되었던 洞契의 座目이다. 하회마을에서 실시된 동계는 ‘河回洞契’라고도 일컫는데, 15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의 좌목 여러 종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본 자료는 天啓 元年(1621) 2월의 좌목과 이 후 두 차례 이루어진 追錄 좌목을 수록하였다. 동계 초창기의 기록으로 보아 하회마을에서의 동계는 늦어도 1584년 이전부터 시행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洞案에는 모두 45명을 수록하고 있는데, 결락된 것이 많아 일부 입록자는 성명이 확인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성명과 字, 출생 간지를 기재하였으며, 관직을 역임한 洞員의 경우 관직명도 기재해 놓았다. 천계 원년의 좌목에는 34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첫 번째 追錄인 崇禎 8년(1635) 12월 25일 좌목에는 9명, 두 번째 追錄인 己卯(1639) 5월 초8일 좌목에는 2명이 수록되어 있다. 입록자를 성씨별로 분류하면, 柳氏 17명, 安氏 10명, 權氏 6명, 金氏, 李氏 각 3명, 許氏 2명, 南氏 1명 순이며, 자료 훼손으로 성씨가 확인되지 않는 자가 3명이다. 하회마을이 豊山柳氏의 집성촌인 만큼 류씨의 비중이 단연 높게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洞契의 시행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영남의 대표적인 班村인 하회마을에서도 일찍이 재지사족 주도의 동계가 시행되었었다. 하회마을에서의 동계를 일명 ‘河回洞契’라 부르는데 대략 늦어도 16세기 후반부터는 시행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동계는 원래 사족인 上人뿐만 아니라 下人도 참여하는 동계였다. 이 시기 하회의 사족들은 동계를 매개로 향촌질서를 주도하려는 의도로 본 동계를 운영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본 자료에서는 이러한 상하합계의 형태가 확인되지 않는다.
洞員의 성씨별 분포를 확인해보면, 단연 柳氏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으나 타성의 비중이 50%가 넘는 것이 주목된다. 당시 하회의 거주자는 지금처럼 柳氏 가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후기와는 다르게 타성도 혼거하고 있었다. "許씨 터전에 安씨 門前에 柳씨 杯盤"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회에는 고려시대에 許氏가 처음 터전을 잡고, 그 다음 安氏가 마을에 들어왔으며, 그 다음에 柳氏가 자리를 잡아 세 성씨가 함께 살았던 것이다. 하회에서 작성된 18세기 이후의 다른 洞案에는 柳氏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아지는데, 이는 조선중기부터 정착하기 시작한 豊山柳氏의 족세가 강해짐으로써 다른 성씨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하회는 부계 중심의 柳氏 가문이 집성촌을 형성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본 자료에서는 17세기 전후 부계중심의 촌락 거주가 정착되던 무렵의 동계 운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嶠南史學』1, 鄭震英, 嶺南大學校 國史學會,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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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命子, 慶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2009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