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4년 慶尙道淸道郡 留鄕所에서 작성된 鄕案으로 鄕員 39명을 수록
鄕案
[내용 및 특징]
萬曆 42년(1614) 12월 慶尙道淸道郡에서 작성된 鄕案이다. 재지사족 중심의 유향소 운영은 조선중기이래 확산되었으며, 청도군에서는 16세기부터 그 존재가 확인된다. 아울러 유향소 구성원 명부인 향안도 작성되었는데, 1599년에 작성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도군에서는 이때부터 시작해서 17세기 전반기 집중적으로 향안이 작성되었다. 현재까지 대략 9종의 향안이 淸道鄕校에 소장되어 왔으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614년에 작성된 향안이다. 9종의 향안 중 다섯 번째로 작성된 것이다. 한편, 그간 청도에서 작성된 향안은 『淸道鄕案正名錄』에 모두 엮여져 있다. 이 책자는 청도향교에서 1911년 간행한 것으로, 조선중기 이래 청도 지역의 향안 작성 추이와 입록자의 현황을 파악 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14년 향안에는 金遇錘 이하 모두 39명이 입록되어 있다. 본 향안은 이전에 입록되었던 鄕員 중 당대에도 鄕員으로 현존했던 인물과 새로 追入된 인물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1610년의 향안과 비교하면 3명이 늘어난 것으로, 1599년 향안 이래 그 입록자는 증가하는 추세였다. 좌목은 입록자의 官職 또는 職役, 兵種을 먼저 기재한 뒤, 성명을 아래에 기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입록자 1명을 제외하고 그 성명 위에는 ‘仙’ 또는 ‘屳’이라 부기되어 있다. 훗날 어느 시점에 향안 입록자를 상고하는 과정에서 관련자가 사망한 자를 부기한 듯하다.
입록자 39명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朴氏 15명, 李氏 11명, 崔氏 3명, 郭氏, 金氏, 芮氏 각 2명, 高氏, 閔氏, 張氏, 趙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좌목 말미에는 鄕任으로 당대 향원 중 座首와 別監을 맡고 있던 인사들의 성씨와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座首는 1명으로 朴氏였으며, 別監은 2명으로 李氏와 朴氏였다. 이상 입록된 자들의 성관을 나열하면 固城李氏, 密陽朴氏, 載寧李氏, 金海金氏, 驪興閔氏, 咸安趙氏 등이며, 玄風郭氏와 夏山張氏가 1614년 향안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이전 향안에 비하여 추가 입록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은 밀양박씨로, 1614년 향안에 3명이 새롭게 입록되었다. 전체적으로 박씨, 즉 밀양박씨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추세였다. 이 가문은 16세기 朴河澄을 필두로 지역을 대표하는 사림파 인물을 배출했던 가문이기도 하다. 한편, 이상의 입록자 성관을 살펴보면 舊來의 청도 土姓 대신, 타 고을에서 이주해온 성관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향안 입록자 39명의 官職이나 職役, 兵種 등을 분류하면 幼學 20명, 忠義衛 6명, 奉事 4명, 校生 3명, 參奉, 僉正 각 2명, 縣監, 進士 각 1명 순이다. 단연 幼學의 비중이 높으며, 이전 향안과 비교한다면 처음으로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수치이다. 향교 校生의 직역으로 등장하는 인물도 처음 확인된다. 1614년 향안 입록자의 실직 역임 비율은 종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다. 이는 17세기 이후 재지사족의 官路가 어려워지는 추세와 맥을 같이하며, 이 추세는 지속되어 후기로 갈수록 향안 권위의 약화로 이어진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안 작성의 추이와 17세기 전반기 청도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표방할 수 있는 각종 조직을 운영해 왔는데, 그 중 하나가 留鄕所였다. 유향소는 조선시대 사족 중심의 지방자치행정기구로 그 구성원을 鄕員이라 했으며, 이들의 명부를 鄕案이라 하였다. 아울러 재지사족들은 16세기 이후 향촌사회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鄕約을 유향소의 제 규정인 鄕規와 접목시켜 실시해 나갔다. 이를 통해 재지사족들은 자신들 주도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그 구성원 명부인 향안을 배타적으로 작성하였다. 향안은 곧 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재지사족임을 표방하는 근거이기도 했던 것이다. 청도 지역에서도 이러한 추세 속에 향안이 작성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청도향안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599년 향안이다. 청도 지역의 향안은 이때부터 17세기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작성된 것으로 나타나는데, 전란 직후 피폐해진 향촌사회 복구 사업과 맞물려 진행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향안의 정비를 통해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복구 및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청도 지역의 향안에는 토성이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청도의 토성으로는 申, 金, 白, 李, 曺氏가 확인되지만, 청도 지역 향안에서 확인되는 가문은 청도김씨 밖에 없으며, 그나마 입록 비중이 매우 미미한 편이다. 이와는 달리 17세기 이전 혼인과 卜居 등을 통해 청도에 이주한 가문들 위주로 향안 좌목이 구성되어 있다. 고성이씨, 밀양박씨, 경주이씨, 재령이씨, 김해김씨, 의흥예씨 등이 여기에 해당되며, 이들에 의해 청도 지역의 향론이 주도되었던 것이다. 이들 가문들은 1599년 향안이 작성될 무렵부터 본 향안이 작성되기까지 입록자의 다수를 차지하였었다. 반면 전후 향안을 살펴보았을 때, 타 가문의 입록은 매우 미미하게 나타난다. 본 향안에서 하산장씨와 현풍곽씨와 같은 새로운 가문이 등장하나 청도에서 이들의 族勢는 매우 미미하며, 이후 향안에서의 비중도 매우 낮다. 반면 밀양박씨, 고성이씨처럼 일찍이 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자리 잡은 성관들은 그 입록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게 된다. 17세기 전반기 유향소를 중심으로 지역 내 지위를 고착시킨 가문들이, 향안을 배타적으로 운영함으로써 그 지위를 지속시키려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嶠南誌』,
『淸道鄕案正名錄』, 淸道鄕校,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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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大史學』22, 申正熙, 嶺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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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2
『釜大史學』22, 張東杓, 釜山大學校史學會, 1998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