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9년 慶尙道淸道郡 留鄕所에서 작성된 鄕案으로 鄕員 23명을 수록
鄕案
[내용 및 특징]
1599년 慶尙道淸道郡에서 작성된 鄕案으로 淸道鄕校에 소장되어 온 자료이다. 청도향교에는 대략 9종의 향안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 향안은 그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것이다. 청도 지역에서 향안은 17세기까지 작성된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역대 청도 지역에서 작성된 향안의 좌목은 1911년, 청도향교 간행 『淸道鄕案正名錄』에 모두 수록되어 있어, 청도 지역 향안 작성의 추이와 향원의 입록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다.
본 향안이 작성된 시기는 1599년이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창 전후복구 사업이 이루어지던 시기로, 당시 향안에 입록된 사족과 가문 주도로 향촌사회가 복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안에 입록된 23명을 성씨별로 구분하면 李氏 13명, 朴氏 4명, 金氏 2명, 崔氏, 閔氏, 盧氏, 趙氏 각 1명이다. 이씨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박씨와 김씨도 향안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들의 성관은 固城李氏, 密陽朴氏, 慶州李氏, 載寧李氏, 淸道金氏, 金海金氏, 長淵盧氏, 驪興閔氏, 咸安趙氏 등이다. 청도 지역 土姓 보다는 타 고을에서 이주한 성관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편, 본 향안에서는 입롭자 23명을 제외하고 여섯 군데에서 削籍 흔적이 나타나지만, 그 사유는 확인되지 않는다.
향안의 말미에는 좌목 작성 연도가 기재되어 있는데, 萬曆 27년(1599) 5월로 명기되어 있다. 날짜 아래에는 당시의 座首 1명과 別監 2명도 함께 명기해 놓았지만, 현재의 향안에는 별감 2명 중 1명이 삭적되어 있다. 본 향안에서 삭적된 6명 중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당시의 좌수와 별감은 성명 아래에는 手決을 기재해 놓았다. 1599년 당시의 좌수는 朴誠, 별감은 李廷郁인 것으로 확인된다. 한편, 입록자의 성명 앞에 ‘屳’이라 기재되어 있는 鄕員은 모두 20명이다. 이는 훗날 향안을 상고했을 때 작고한 이들을 표시한 것으로, 향안 작성 후 어느 시점에 명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 향안의 좌목은 성명을 기재하고, 그 위에 관직 및 職役, 그리고 사족들이 종사하는 兵種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어 있다. 입록자를 관직 및 職役, 그리고 병종별로 구분하면, 幼學 8명, 忠義衛 6명, 僉正과 僉知 각 2명, 習讀, 進士, 郡守, 水使, 內禁衛 각 1명 순이다. 단연 幼學의 비중이 높아 전체 입록자 중 35%를 차지하고 있으나, 이는 후대의 향안에 비해 매우 낮은 수치이다. 17세기 전후만 하더라도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정립과 더불어, 이들의 중앙 진출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입록자 가운데 주목할 것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 출신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水使의 관직으로 입록된 李雲龍(1562~1610)은 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임란 의병장이었다. 그의 성관은 재령이씨로, 그의 일족과 후손들은 청도 지역의 향권을 주도하며 다수의 향안 입록자를 배출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안 작성의 추이와 조선중기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자치행정기구인 留鄕所 鄕員의 명부를 일컫는 것이다. 향안이 광범위하게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반 이래 鄕約 보급이 확산되면서이다. 당시 재지사족들은 유향소의 운영 규범인 鄕規에 향약을 접목시킴으로써, 사족 주도의 향촌지배질서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아울러 향안 작성을 배타적으로 운영함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좀 더 확고히 했던 것이다. 이러한 향안 작성은 특히 17세기 전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경상도 청도 지역에서도 17세기 이전 향안 작성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데, 본 향안은 현존하는 청도향안 중 가장 오랜 된 1599년의 것이다. 그리고 본 향안은 임진왜란 직후, 향촌사회를 복구하는 과정과 맞물려 사족 주도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본 향안에 수록된 향원들은 당시 청도 지역의 향촌사회를 주도하던 유력한 사족 가문 출신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청도향안에 수록된 인물 중 舊來의 청도 土姓은 확인되지 않는다. 청도의 토성으로는 申, 金, 白, 李, 曺氏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본 자료에서는 金氏만 확인되고 있다. 입록자도 1명에 불과해 본관지에서의 족세 역시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이와는 달리 고성이씨, 밀양박씨, 경주이씨, 재령이씨, 청도김씨, 김해김씨 등 이주 성씨의 족세가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가문은 17세기 이전 혼인과 복거 등을 통해 청도에 이거한 사족 가문인 것이다.
『嶠南誌』,
『淸道鄕案正名錄』, 淸道鄕校, 1911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釜大史學』22, 申正熙, 嶺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1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2
『釜大史學』22, 張東杓, 釜山大學校史學會, 1998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