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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경상도(慶尙道) 안동부(安東府) 향안(鄕案)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589.4717-20120630.Y1240416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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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589
형태사항 크기: 40.5 X 31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33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병산서원 /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산리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산33

안내정보

1589년 경상도(慶尙道) 안동부(安東府) 향안(鄕案)
1589년에 작성된 경상도(慶尙道)안동부(安東府)의 향안(鄕案)으로, 향록(鄕錄)은 향안의 다른 이름이다.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 양반들 주도의 자치행정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구성원 명단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향안에 명단을 올림으로써 해당 고을의 여론에 영향을 끼쳤으며, 양반들 역시 향안 입록을 도모함으로써 지역 사회에서의 지위를 유지해 나가려 했었던 것이다. 안동부에서는 16세기 전반부터 18세기까지 시기를 달리하는 여러 종의 향안이 작성되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6세기 후반의 구성원 명단을 수록하였기에, 당시 안동부 여론을 주도하던 가문과 인물들을 파악 할 수 있다. 모두 289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안동권씨(安東權氏), 의성김씨(義城金氏), 영양남씨(英陽南氏), 동래정씨(東萊鄭氏), 풍산류씨(豊山柳氏), 고성이씨(固城李氏)의 비중이 비교적 높게 나타나, 이들 가문 출신 양반들에 의해 당시 안동부의 여론이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본 자료는 1589년에 작성되었지만 실제 엮여진 것은 그 후대이다.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이 향안이 파손되었기 때문에 새롭게 작성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에 없던 인물들이 사사롭게 추가되어 그것을 파기한 뒤 이것을 작성하였다고 자료 말미에 밝혀 놓았다. 향안 입록을 둘러싸고 안동부에 거주하는 여러 가문들 간의 갈등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589년에 작성되었던 慶尙道安東府의 鄕案을 이후에 다시 改錄한 것으로 모두 289명의 鄕員 명단을 수록
[내용 및 특징]
慶尙道安東府에서 작성되었던 鄕案을 改錄한 것이다. 모두 289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원본은 萬曆 17年 己丑(1589) 7월에 만들어졌었다. 改錄한 사실은 자료의 말미에 기재되어 있으며, 改錄 당시의 座首는 前 縣監 李, 別監은 權氏 3명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鄕任의 手決이 모두 있으나, 改錄 연도는 확실하지 않다.
자료 말미에는 改錄 사유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己丑年의 향록은 전란으로 파손되어 원본은 전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留鄕所에서 새롭게 향록을 작성하였는데, 문제는 그것이 이전의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前案에 없었던 인물들이 私意에 의해 엄연히 입록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鄕議가 激發하였고, 그런 까닭에 이것을 파기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본 향록과 같이 改錄하였으며, 아울러 잘못된 ‘誤書之案’도 함께 封上하여 훗날 열람을 대비할 것이라며, 향록의 改錄 사유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誤書之案’의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17세기 초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향록, 즉 향안을 중수하는 과정에서 안동 지역 사족들 간의 갈등이 야기되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이 향록에는 모두 289명의 입록자를 수록하고 있다. 먼저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 또는 병종을 기재한 후 성명을 기재하였다. 성명 하단부에는 출생 간지가 기재되어 있는데, 좌목의 배열순서는 나이 순인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파손된 향록을 상고하여 당시의 입록자를 기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입록 순서가 아닌 나이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입록자의 성씨를 입록 비중 별로 나열하면 權氏 68명, 李氏 50명, 金氏 44명, 南氏 18명, 鄭氏 16명, 裵氏, 安氏 각 12명, 朴氏, 柳氏 11명, 申氏 6명, 琴氏 5명, 禹氏, 河氏 4명, 邊氏, 張氏, 黃氏 3명, 康氏, 具氏, 孫氏, 宋氏, 余氏, 趙氏 각 2명, 文氏, 潘氏, 吳氏, 玉氏, 泰氏, 許氏 각 1명 순이다.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 병종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學生 176명, 忠義衛 19명, 部將 16명, 生員, 忠順衛 각 11명, 參奉 10명, 進士 9명, 習讀 7명, 訓導 5명, 定虜衛 3명, 判書, 佐郞, 郡守, 縣監, 監察, 引儀 2명, 判事, 府使, 師傳, 萬戶, 敎授, 博士, 直長, 別坐, 僉正 각 1명 순이다. 幼學이라 할 수 있는 學生의 비중이 60%로 단연 높지만 다양한 관직과 직역 및 병종을 가진 인사들이 입록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한편, 입록자 가운데는 削籍 되었다가 다시 입록된 인물이 4명 확인된다. 削籍 사유는 별도로 기재되어 있지 않은 채, ‘削籍還入錄’이라 付黃되어 있다. 향임도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座首는 康崙이며, 別監은 張彭壽, 權夢參, 南廊 3명이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전후 향안 작성의 추이와 더불어 이 시기 안동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경상도안동부에서는 조선중기 이래 여러 편의 향안이 작성되었다. 현재까지 대략 10여 종의 향안이 전해지고 있으며,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30년의 향안이 전해지고 있다. 이 향안들은 안동부의 유력한 재지사족 가문과 서원 및 향교 등에 산재되어 있으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풍산류씨 종택인 忠孝堂 소장의 향안이었다.
이 향록의 입록자 289명은 당대 안동 지역을 대표하던 재지사족 가문 출신 인사였다. 주요 성씨로는 安東權氏, 義城金氏, 英陽南氏, 東萊鄭氏, 豊山柳氏, 固城李氏 등이 확인된다. 이들 가문은 조선전기부터 꾸준히 성장하여, 본 향록이 작성되는 16세기에는 안동부를 대표하는 재지사족 가문으로 자리 잡았으며, 조선후기까지 그 족세를 유지했던 가문이다.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 병종 등은 그 종류가 다양하다. 17세기 중반 이후 幼學 또는 學生 일변도의 향안 입록자 구성과는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중앙정권의 閥閱化에 따라 재지사족의 관로가 점차 어려워지는 정치적 배경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한편, 말미에 改錄 사유를 보면 향안 운영을 둘러싼 재지사족 갈등이 심각하게 전개되었음을 엿 볼 수 있다. 17세기 전후 향안의 권위가 강했던 시기, 향안 입록은 곧 鄕權 주도와 직결되는 문제였기에 유력한 재지사족들은 향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해당 가문의 향권 영향력을 높이려 하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16세기 향안 입록자의 이견 차이가 안동부 사족들 간에 불거지게 되었고, 새롭게 향안이 改錄되는 양상으로 전개된 것이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古文書集成』20, 國學振興硏究事業 運營委員會,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94
『大東文化硏究』35, 정진영,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1999
『大東文化硏究』38, 정진영, 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2001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