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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덕붕(池德鵬) 향약서(鄕約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C.0000.4729-20120630.Y1240107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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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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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지덕붕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용성면 용천리
형태사항 크기: 28.7 X 19.4
판본: 석판본
장정: 선장
수량: 5권 2책
판식: 半郭 : 14.2x20.2㎝, 四周雙邊, 有界, 10行20字, 上二葉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지덕붕(池德鵬) 향약서(鄕約序)
19세기 후반 경상도(慶尙道)자인현(玆仁縣)육동(六洞)에서 지덕붕(池德鵬)의 주도로 결성되었던 향약의 서문이다. 육동에서는 일찍이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때 쓰일 공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契)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다. 지덕붕은 인근 고을인 하양현(河陽縣) 출신의 유학자로 만년에 육동에 은거하였고, 종전에 실시되던 이곳의 전통적인 계 조직을 유교식 규범인 향약으로 변모시켰던 것이다. 본 서문에는 이곳에서 실시된 향약의 의의와 조직 목적, 대략적인 운영양상이 나타난다.
이광우

상세정보

19세기 후반 慶尙道慈仁縣六洞에서 실시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향약의 序文으로 河陽縣 출신의 유학자 池德鵬이 작성
[내용 및 특징]
19세기 후반 지금의 慶尙北道慶山市龍城面龍川里六洞에서 실시되었던 향약의 서문이다. 육동은 조선시대까지 慶尙道慈仁縣에 소재했던 마을이었다. 서문을 작성한 인물은 인근 河陽縣槐田里(現 대구광역시동구괴전동) 출신의 유학자 池德鵬이다. 지덕붕이 이곳의 향약 서문을 작성하게 된 인연은 그가 만년에 육동에 은거했기 때문이다. 그의 문집인 『商山集』에는 64세가 되던 1867육동에 觀遊亭을 짓고 학문을 연마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향약이 제정된 듯하다.
서문에는 향약의 실시 의의와 시행 경위, 그리고 기본적인 운영방안과 구성원들에 대한 당부를 언급하고 있다. 먼저 『周禮』에 나오는 大司徒의 관직과 三物, 八刑의 규범을 예로 들며 향촌자치 규약의 오랜 유래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육동에서도 향촌 자치 규약인 향약을 제정하게 되었는데, 이에 앞서 육동에서는 마을의 老少가 의논하여 喪葬禮가 있을 때마다 서로 도와주는 의도로 각기 약간의 곡식을 내어 공동자금을 마련하는 契가 조직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육동에 은거한 지덕붕이 3월에 열린 계의 모임에서 그 규약을 확장하여 향약을 실시하기를 건의하게 되었고, 모두의 동의를 얻게 되었다.
상장례가 있을 때 공동자금 마련을 위해 조직되었던 육동의 계 조직이 지덕붕의 건의로 향약 조직으로 변모한 것이다. 이에 『주례』의 司徒를 전범으로 하고, 藍田呂氏鄕約의 4대 절목인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을 규범으로 삼았으며, 향약의 우두머리인 約正과 실무자인 直月을 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 구성원 모두가 향약의 제 규정을 성실히 준수할 것을 당부하며 서문을 마치고 있다.
[자료적 가치]
경상도자인현육동에서는 喪葬禮 때 공동으로 사용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契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러한 계 조직이 19세기 후반 인근 고을의 유학자 池德鵬에 의해 향약의 규정을 적용하여 새롭게 제정되었다. 지덕붕이 거주하기 이전 육동이라는 동리의 존재양상은 명확하지 않으나, 유교 의례의 수용을 통해 상부상조를 위해 결성되었던 계 조직이 향약으로 변모되어가는 양상의 일면모를 살펴 볼 수가 있다.
池德鵬의 문집인 『商山先生文集』 卷4 序 十三에서 十四까지「鄕約序」란 제목으로 수록
『商山先生文集』, 池德鵬,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경산문화연구』4, 권영철,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 2000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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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지덕붕(池德鵬) 향약서(鄕約序)
鄕約序
鄕之有約古也昔盛時射有儀飮有禮居有伍井
有助此鄕約之權輿也歟於是大司徒賓之以三物
糾之以八刑俗美於下治隆於上也自世降俗渝人
不修睦甚至於同室相鬪况鄕井相愛之風可得以
觀哉惟我聖上挽三代之治而振八域之民使日
遷善遠過而納諸軌轍誠羣黎一慶之時也雖荒裔
窮堧莫不感發而興起况吾嶺素稱鄒魯之鄕耶今
六洞之奠于玆不知其幾百年而風淳俗朴可與爲
仁亦鄒魯之一也先是里中老少以死喪相救之意
各出若干粟爲之資而歲一會焉以修契事誠美擧
也余飮六水之翌年三月與其會而贊其美又從而
告之曰盍廣其規倣古鄕約乎咸曰諾夫好善性也
而非先覺者導之無以知爲善之方願吾子導之余
實懵然而義不可辭遂以周禮司徒之典爲之本而
略取藍田呂氏節目爲之規其曰德業相勸過失相
規禮俗相交患難相恤皆當下急務也擇勤而有信
者爲直月察其臧否施其勸懲如約而惟約正是聽
之正重任也非余堪當而其奈辭不獲何哉乃執其
義而復之曰時有古今而理無古今惟在力行何如
耳苟能如是則上裨聖化下成美俗而果無愧爲
鄒魯之民矣然詩云靡不有初鮮克有終若始勤而
終怠有名而無實則反不如無約之爲愈也可不念
哉咸曰唯遂悉次顚末謹書其端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