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대 초반 慶尙道觀察使의 권장으로 慶尙道永川郡 일대에서 시행되었던 향약의 後敍로 영천군泉味 출신의 유학자 李熙魯가 작성
[내용 및 특징]
19세기 말미 慶尙道永川郡 일대에서 시행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향약의 後敍이다. 後敍는 영천군泉味 출신의 유학자 李熙魯가 작성하였다. 작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은데 後敍 중간에 慶尙道觀察使李□永(1837~1907)이 향약 관련 책자를 만들고 배포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1890년대 초반으로 여겨진다. 이헌영은 1891년에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였는데, 재임 도중 『鄕里約束』을 엮어 경상도 각 고을에 반포한 뒤 향약 시행을 권장 했다는 사실로 보아 본 자료의 작성 시기도 이와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後敍에서는 향약이 北宋藍田의 呂氏鄕約과 朱子의 朱子增損呂氏鄕約에서 시작되었으며, 우리 영남에서 여러 선배들이 이를 본 받아 향약을 실시했다며 그 유래를 간략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각자 家塾과 庠序에서 詩와 書를 가르치고 禮義를 단속함이 이루어져 풍속이 아름다워져 가히 鄒魯에 버금가게 되었으니, 列聖朝에서 이를 더욱 배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 세상 풍속이 점점 천박해지고 사류들은 이익을 다투는 일이 많아져 德業을 서로 권하거나 과실을 서로 규제함에 없어지게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경상도관찰사이헌영이 해이해진 풍속을 바로잡고 이끌고자 향약의 조약을 增削하여 1책으로 만들어 列郡에 반시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향리약속』을 반포인 것이다. 이에 대해 各邑의 사족들이 스스로 立約하여 講學하고 習禮한 뒤 이를 실천해서 집집마다 전해지며, 선악을 살펴 상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게 되었으니 이는 과연 옛적의 五敎와 八政을 모방한 것이라 평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漢나라 때 蜀郡太守가 되어 오랑캐의 풍습을 교화시켰던 文翁과 唐나라 때 潮州刺史로 있으면서 문풍을 진작시켰던 韓愈의 업적에 비유하였다.
後敍 말미에는 이희로 본인이 비록 미흡하지만 卷末에 감히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명확하지는 않으나 卷末이라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영천에서 시행하기 위해 제정되었던 약조 말미에 수록되었던 後敍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약조는 이헌영이 배포했던 『향리약속』과 거의 동일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료적 가치]
19세기 후반 향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7세기 전후까지만 하더라도 고을 단위로 시행되는 향약의 경우 留鄕所를 중심으로 지역의 유력한 재지사족이 주도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재지사족들은 이러한 향약을 매개로 지역 사회 내에서의 위치를 곤고히 하며, 관권과 협도 또는 견제하는 기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종전의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붕괴됨에 따라,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複雜多技한 각종 갈등이 표출되었고 결국 고을 단위의 향약도 파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가운데 오히려 고을 단위의 향약은 지방관 주도 하에 새롭게 시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방관들은 향약 시행을 통해 지방민들을 교화시키겠다는 명분을 표방하지만, 여기에는 효과적인 통치의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1891년 경상도관찰사로 파견되었던 이헌영의 경우 『향리약속』을 경상도 각 고을에 배포함으로써, 고을의 하부 행정단위인 面里 조직까지 포함하는 향약을 권장하였다. 이는 백성들에 대한 자치적이 규제를 관청이 총괄함으로써 백성 교화와 효과적인 통치를 도모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자료에서는 이러한 향약 시행의 양상을 단편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李熙魯의 문집인 『東庵集』 卷2 序 五에 「鄕里約法後敍」란 제목으로 수록
『東庵集』, 李熙魯,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