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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년 청하향안(淸河鄕案) 중수(重修) 서문(序文) 및 좌목(座目)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XG.1767.4711-20110630.Y111020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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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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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주체 홍옥보, 청하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덕성리
작성시기 1767
형태사항 크기: 38 X 26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포항 청하향교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덕성리 문중소개

안내정보

1767년부터 1819년까지 작성한청하현의 양반들의 명단
이 문서는 청하현에서 작성된 1767년부터 1819년까지의 향안으로 모두 195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 문서는 1767년 5월에 청하현감홍옥보가 지은 서문과 구향안을 개수하여 수정한 명단, 기간별로 추가로 작성한 명단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1767년 6월에 구향안을 수정하면서 모두 83명의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같은 날에 향임 3명을 포함하여 36명이 추가로 기록되었는데, 각기 김 22명, 이 13명, 금 1명으로 금씨가 새롭게 나타난다. 이 향안에는 1767년 6월 이래로 1819년 9월까지 모두 20회에 걸쳐 추록이 나타난다. 1797년까지 김씨 38명, 이씨 23명, 안씨 5명, 금씨 1명이 추가로 기록되었는데, 이는 청하일대에서 이들 4개 성씨가 주요 사족으로 있었음을 나타낸다. 이후 약 20년이 지난 1819년까지 5차례의 추록이 있었다. 여기에는 윤씨 5명과 곽씨 1명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다. 이는 19세기 들어 청하지역에 새로운 사족인 윤씨와 곽씨가 들어왔음을 알려 주는 것이며, 이 지역의 강력한 재지사족인 김씨와 이씨는 당시의 여타 지역의 사족들이 그러했듯이 문중 중심의 서원, 사우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이병훈

상세정보

1767년에 重修한 淸河鄕案의 서문(序文)과 양반들의 명단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淸河縣에서 작성된 1767년부터 1819년까지의 鄕案으로 모두 195명이 기재되어 있다. 향안 작성에 관하여 鄭經世는 “향중에 향안이 있는 것은 世族을 辨別하기 위함이다. 세족을 변별함은 장차 그들로 하여금 一鄕에 기강을 세우고 민속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향안은 재지사족의 공론에 따라 작성된 목록으로써, 재지사족의 신분적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재지사족은 이 향안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장치로써 鄕會를 구성하고 운영하였다. 즉 향안의 작성은 그 지방 지배세력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향안의 기능은 재지사족을 결집시키고 향촌사회에서의 사족중심 체제를 유지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향안을 통해서 재지사족들이 지배구조를 계속 관철시키고자하는 움직임은 18세기에 이르러서 한계에 다다른다. 이는 재지사족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농민층에 대한 지배를 효율적으로 하지 못하고, 사회적 변동 속에서 사족들의 물질적·경제적 토대가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 문서의 서문과 입록자들을 분석해보면 보다 명확해진다. 이 문서는 1767년 5월에 청하현감洪沃輔가 지은 서문과 舊鄕案을 개수하여 수정한 座目, 기간별 추록 座目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하현에서 향안을 중수한 목적을 서문을 통해 살펴보면, 근래 향풍이 쇠하여 鄕中의 公論도 없이 자격이 미달인 자들이 돈을 내고 冒錄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를 바로 잡아 향후 鄕中의 公議에 따라 踏印을 할 것이며, 사사로이 受錢한 자는 향안에서 삭적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당시 청하현에서도 여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金錢을 받고 향안에 入錄하는 자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전에 어떤 인물들이 향안에 올랐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1767년 6월에 舊鄕案을 수정하면서 모두 83명의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이들은 李 39명, 金 38명, 安 5명, 申 1명으로 이전까지 청하현에 거주하던 양반들로 보인다. 같은 날에 향임 3명을 포함하여 36명이 추가로 입록 되었는데, 각기 金 22명, 李 13명, 琴 1명으로 琴氏가 새롭게 나타난다. 이 향안에는 1767년 6월 이래로 1819년 9월까지 모두 20회에 걸쳐 추록이 나타난다. 入錄은 2~3명에서 많게는 9명으로 10명 이내의 인원들이었다. 향안의 改修이래 30년이 지난 1797년까지 金氏 38명, 李氏 23명, 安氏 5명, 琴氏 1명이 추록되었는데, 이는 청하일대에 이들 4개 성씨가 재지사족의 주요 구성원이었음을 나타낸다. 이후 약 20년이 지난 1819년까지 5차례의 추록이 있었다. 여기에는 李·金氏의 1명씩을 제외하고 尹氏 5명과 郭氏 1명이 새롭게 입록되고 있었다. 이는 19세기 들어 청하지역에 새로운 사족인 윤씨와 곽씨가 들어왔음을 알려 주는 것이며, 이 지역의 강력한 재지사족인 김씨와 이씨는 당시의 여타 지역의 사족들이 그러했듯이 문중 중심의 서원, 사우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실록지리지』을 보면, 15세기 중반 청하현에는 李, 金, 明씨의 土姓과 朱, 鄭씨의 續姓, 南界部曲에 吉氏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작성된 淸河邑誌에는 李, 金, 安, 崔, 郭, 鄭, 白氏만이 나타나고 있다. 토성이었던 明氏와 속성인 朱氏, 部曲姓인 吉氏는 나타나지 않는다. 부곡성인 길씨는 조선전기 鄕所部曲 등의 任內를 直村化하면서 面·里 姓氏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속성인 주씨는 熊川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직촌화 과정에서 州縣姓으로 편입 내지 타읍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 대개의 토성이족들이 그렇듯 사족화 과정에는 科擧, 軍功, 學文, 卓行 등이 중요한 수단이 되며, 그것은 또한 일정한 부와 학문적 기반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청하현의 재지사족 형성은 타읍에 비하여 늦게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세기 말에 작성된 청하읍지 인물조에는 문과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다. 다만, 生進試에 합격한 자가 3명 있으며, 그 외는 효행으로 이름을 남긴 자들이었다. 생진시 합격자는 김씨 2명과 이씨 1명이며, 효자·효부들 역시 김씨, 이씨와 관련된 자들이었다. 청하현의 토성 중 이·김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하였던 명씨는 임란이후 작성된 향안뿐만 아니라 읍지에서도 그 행적을 살펴볼 수 없다.
자료적 가치
청하현 일대의 대표적인 사족들의 명단으로 이 지역의 재지사족의 변천을 알 수 있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이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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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7년 청하향안(淸河鄕案) 중수(重修) 서문(序文) 및 좌목(座目)
鄕案重修序
夫邑有鄕鄕有樂鄕案之法
盖出於周禮孝友睦婣任恤
六行之敎而伊洛羣賢治郡之
法亦不外於鄕約矣其例也列
書一鄕之士於一冊寘之鄕中令
長者爲鄕長有司之任訓子弟
勉親戚使之入則孝父母出則
敬官長于以盡孝悌之行雖
非本鄕之士而自遠流寓者築室
久居而其地閥人望不下於本鄕之人
則從公議入錄之同爲周旋於隣里
鄕?係是忠厚禮讓之風嶺南
索稱鄒魯之鄕安東則鄕案者
古著聞非不幷論而至於他邑首
有流風遺俗之可觀者而惟悳
城一故僻在海隅所謂鄕案謬
例流傳有異他邑鄕人入錄之時謂
之案禮以肆然受錢爲之重本
而踏印手決冒錄于噣之弊豕
由是生焉余莅任後以本邑鄕案
經一不好本有寓客南性人忽
然告官鄕人初許錄案先捧禮
錢而中途改路末乃擯斥云聞甚
不美離鄕見賤羈蹤可憐見
其案則便成公簿官長處斷其
在一視之政不忍以流寓之客而退
斥?以成義拂拭之意親書鄕案
原其本事則出於無心而鄕人看
心大事謂之逮格而羞與同刊擧
皆自割其名噫噫誠化分義事體
至重則其在下民之厄雖曰官長
之誤着而恣意相抗若是無嚴
乎新錄之人誠若不合公議則爲鄕
長者從容入官以前例不然後弊所
關之意㨿理爲言則自當曲從鄕
論則刊其名而不有官長前後恠
擧岡有紀極値有官前焚案將
使刑配之擧如此之或不無憤頭處
分閉閤惠過至今愷惜而鄕風之
不收有愧隣邑噫處其弊源則鄕
中有受賂云法故鄕人有倖入之弊
鄕案有踏印之規故官長有自斷
之擧受錢踏印自有鄕案以來所
無之事也旣往勿說欲致惟新之
敎使之改修鄕案而一後公議不容
私意受錢踏印之法自今爲始一幷
革罷使錄案之人皆知勵廉恥
敦行誼使後之官長亦知遵鄕
約待以員則其爲官民之兩得風
化之有補爲如何哉道爲小識錄
之卷首云爾
丁亥榴花節己望
主倅豊山後人洪沃輔
乾隆三十二年丁亥六月 日 舊鄕案改修正
金如一
李尙烈
金昌世
金是濬
李杞
金是陽
李必楷
申斗老
李德淵
安道榮
金是白
金重兆
金浹
李斗炫
李成輝
李啓世
李德濟
金尙泗
金萬錡
李震白
李震元
李薰
李薰
李芸
李蘅
金重億
李重爀
金天溥
李宜春
金世皓
金萬鉉
金萬鎌
金洞
金湍
金漳
金浩
金沂
金昌殷
李茂
金昌周
金南錫
李蓂
金世夏
李時彰
李德□
金世綱
金智甲
金萬球
金泰錫
李柱厦
李震慶
李德標
李莢
李筌
金昌鼎
金昌說
李昌郁
安是憲
安道常
李楚鳴
李敏松
李震蓂
安是輪
金再澄
李鳳瑞
李啓周
金昌鉉
李聖觀
金世周
金天潤
李秀春
李光得
李鳳起
金南□
李觀徵
金南薰
金夏重
金漢白
安□道
李啓殷
金道欽
李夢龍

鄕長金昌夏
乾隆三十二年丁亥六月日鄕案
金南泰
金昌夏
李大觀
李瑾
李聖一
李昌國
李葆
金天白
金夏鉉
金昌奐
金瑞奎
金瑞玉
李鳳徵
金昌□
李龜徵
金光玉
金夏鏞
金得說
金南朱
金昌釴
李震莢
李國龍
李葂
金景鎬
金德澄
琴慶河
金尙白
金昌鎬
金南俊
李光珎
李□龍
金夏鍊
李光宙
李光迪
金益徵

鄕長金南泰
金昌夏
李大觀
三十六年辛卯五月日
金汝九
金相玉
李國老
金聖弼
金昌鎰
李錫春
李現龍
金昊錫
金□王
李□健
李宜孝
李赫龍
金禹玉

鄕長李大觀
李聖一
李葆
三十七年壬辰五月日
金□說
安國奐
李德輔
安國恒

鄕長李大觀
李聖一
李葆
三十八年癸巳三月日
金宗漢
金䂓玉

鄕長李聖一
李葆
金昌奐
巳十二年丁酉六月日
李凞祖
金宗一
金洛範
金必玉
金凞玉
金聖龍
金仁玉
金鍊玉

鄕長李聖一
李葆
金昌奐
同年七月日
安□□

鄕長李聖一
李葆
金昌奐
四十七年壬寅七月日
金達海
李□奐
李□春

鄕長李葆
金昌奐
李鳳徵
五十年乙巳四月日
金應鎬
金龍傑
李宜喆
李宜陽
金聖集
李時檉
李宜賢
金□泰
李寅卓

鄕長李葆
金昌奐
李鳳徵
同年五月日
金秀玉
金性玉
金禹九

鄕長李葆
金昌奐
李鳳徵
同年八月日
李順成
李鳴玉
金致玉
安尙仁

鄕長李葆
金昌奐
李鳳徵
五十一年丙午六月日
李宜默
金洛成

鄕長李葆
金昌奐
李鳳徵
五十四年己酉四月日
金宗鍊
金和玉

鄕長李鳳徵
李震標
李光□
五十四年己酉九月日
李國樑

鄕長李鳳徵
李震標
李光□
金宗翊
金宗海
金景玉

鄕長李鳳徵
李震標
李□健
嘉慶二年丁巳三月日
李宜彪
安思健
金亨東
金城
李亨國
李時泰
李寅彬
金重玉

嘉慶二年丁巳十一月日
鄕長李手決李手決李手決
金洛駿
鄕長李鳳徵
李震標
李□健

嘉慶二年丁巳十二月日
金遇秋
琴舜觀
金箕範

嘉慶八月日
鄕長李廷健
金凞玉
李宜孝
李寅洽

嘉慶十三年閏五月日
鄕長李宜孝
金凞玉
金聖龍
郭時柱
嘉慶二十年乙亥四月日
鄕長金重玉
金鳴玉
尹洙得
尹弼得
尹沂老
嘉慶二十三年三月日
鄕長李宜陽
李載春
李宜彪
金應行
嘉慶二十三年戊寅十二月日
鄕長李宜陽
李載春
李宜彪
尹㶅得
尹慈得
嘉慶二十四年己卯九月日
鄕長李宜陽
李載春
李宜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