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1년에 작성된 永川鄕校 東齋儒生들의 명부인 靑衿案
내용 및 특징
이 청금안은 1751년에 작성된 동재유생들의 명단이다. 이 청금안에는 曺德臣을 포함한 114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을 성씨별로 보면, 鄭氏 29명, 李氏 25명, 金氏 10명, 曺氏 9명, 孫․徐氏 각 6명, 權․成氏 각 5명, 柳氏 4명, 趙․崔氏 각 3명, 尹․全氏 각 2명, 申․朴․張․郭․安氏 각 1명이다. 이외에 都有司 鄭梯, 掌議 徐鵬萬, 鄭相龍 등이 있다.
15세기 중엽의 『世宗實錄地理志』에 나오는 영천군의 土姓으로는 皇甫·申·李·尹氏가, 來姓은 宋·金·兪·崔·沈氏 등 총 9개의 성씨가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작성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克氏와 1497년 신령현이 廢縣되어 영천군에 귀속되면서 신령의 토성이었던 李․朴․丁․史氏가 영천의 來姓으로 등장하여 총 14개의 성씨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嶺南邑誌』에서는 기존의 皇甫氏, 李氏, 尹氏, 申氏 宋氏, 金氏, 克氏, 兪氏, 崔氏, 沈氏 등의 10개 성씨와 신령에서 來幷한 李․朴․丁․史氏의 4개 성씨,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지만 과거에 增補된 曺氏, 鄭氏, 徐氏, 權氏, 安氏, 成氏, 朴氏, 孫氏, 辛氏, 郭氏, 柳氏, 金氏, 盧氏, 田氏, 趙氏 등의 15개 來姓이 나타난다. 대개 邑誌에 등장하는 성씨들이 당시 校院을 출입하던 성씨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모두 士族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청금안의 성씨 중 張氏, 全氏는 19세기 읍지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두 성씨는 영천향교의 儒案에 등재된 성씨들로 일찍이 영천에 세거해온 집안이었다. 仁同人 張壽洪의 경우 청금안에서 移居로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타 지역으로 옮겨갔으며, 全宇楨, 全熙範 등은 龍宮全氏로서 全永昌을 입향조로 두고 있었다. 그는 15세기 중반 世祖의 왕위 찬탈 때 관직을 버리고 永川의 林泉里에 隱居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昌寧曺氏, 安東權氏, 星山李氏, 咸陽朴氏, 延日鄭氏, 慶州金氏, 慶州孫氏, 永陽崔氏, 永川李氏, 慶州鄭氏 등과 혼인을 맺으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용궁전씨들이 영천내에서 가세를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근 사족들과의 혼인도 중요한 요인이 되었지만, 임란 당시 全三益의 軍功과 그의 아들인 全知性의 入格 등도 작용하였다.
향교의 교임은 대체로 동재의 청금유생들 가운데서 수임인 都有司(校長, 齋長, 齋首), 차임인 掌議(校貳), 말임인色掌(有司, 齋有司, 齋任)이 선출되었다. 이 청금안에서는 都有司와 掌議만이 나오고 있다. 이는 18세기 들어 향교의 유사들은 서재교생들이 담당하였으며, 동재유생들 중 장의와 도유사를 선발하여 서재 유사들을 관리․감독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도유사라는 명칭이 처음부터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영천향교에서 도유사라는 직임이 나타난 것은 1629년의 儒案부터이다. 1619년에 작성된 ‘鄕約案’에서는 ‘鄕校卽上有司主之’라 한 것으로 보아 향교를 대표하는 수임인 都有司를 上有司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상유사를 비롯한 교임은 대개 향교에 적을 둔 유생 가운데 文行이나 德行을 갖추고 고을의 명망을 받아 사장이 될 만한 인물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흔히 사류의 영수로 일컬어졌다. 따라서 유안에 등재된 인물들 중에서 교임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1618년과 1622년의 儒案에서는 堂長이라는 명칭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나눠지던 17세기 중반 이전에 儒案이 작성되면서 당시 영천향교의 액내유생 즉 양반유생의 대표를 堂長이라 불렀으며, 17세기 중반이후 액내유생이 양반사족이 아닌 평민, 서얼들의 서재교생을 칭하게 되자 堂長이라는 말은 서재교생의 대표를 칭하는 것으로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즉 1618년의 유안이 작성될 당시의 堂長은 양반유생이었던 것이다. 이들이 자체의 문서 등에서 堂長이라 사용한 것은 이 유안들이 작성되던 시기에 영천향교에는 壬辰倭亂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東齋와 西齋만이 중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1619년에 명륜당이 중수되면서 향교의 대략적인 모습은 갖춰졌지만, 불탔던 대성전은 1622년 9월에 가서야 완전히 중수될 수 있었다. 그래서 1622년 3월에 작성된 유안에서는 首任으로 堂長이 나오며, 1629년 유안에서는 都有司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영천향교에 남아있는 유일한 靑衿錄이다. 향교의 인적구성을 알려주는 자료로는 시기별로 儒案과 儒生案, 校生案으로 불려온 것 외에도 鄕案이 있어서 참고할 만하다. 또한 18세기 영천향교 내부에서의 인적변화를 증명할 수 있는 구체적 자료는 이 청금록이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영천향교 뿐만 아니라 영천 지역내 전체 사족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들 자료 외에도 서원의 원생안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永川邑誌(嶺南邑誌),
永川全誌, 尹聖永 編, 일광인쇄소(대구), 1939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