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4년에 작성한 청하향교 교임(校任)들의 명단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1744년부터 1760년까지 청하향교의 교임직을 맡았던 자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이다. 표제는 任司錄이다. 청하향교는 1398년 金井里에 창건되어, 1713년에 현감노세환이 현청이 있는 덕성리에 이건공사를 착수하였으며, 후임 현감유적을 거쳐 김세우현감때 대성전·명륜당·동재, 2층 천화루, 신삼문, 열호재 등을 완성하여 1716년에 준공하였다. 다시 1843년에 柳道宗현감시에 중수하고, 1923년에 직원 金炳昊와 鄕林이 수리하여 지금에 이른다.
이 자료에서는 모두 66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들은 대부분 성관은 대부분 李, 金氏이며 權氏 2명, 安氏 1명이 나타난다. 시기별로는 1744년에 모두 36명이 기재되었는데, 이를 성씨별로 나눠보면 김씨 18며, 이씨 16명, 권씨 2명이다. 1750년에는 9명 중 김씨 5명, 이씨 4명이 있으며, 1753년에는 김씨 6명, 이씨 3명이 나온다. 1760년 임사록에는 이씨 7명, 김씨 4명, 안씨 1명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8세기 중엽에 향교를 운영한 주체는 김씨와 이씨였으며, 권씨와 안씨가 일부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18세기 이래 향교에는 서얼, 평민의 자제들이 대거 입학함에 따라 이들과 구분하여 별도의 명부를 작성하거나, 거처를 구분하여 차별화하였다. 또한 향교의 교임직에서도 서얼, 평민들의 출입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임사록에 입록된 66명은 모두 청하에 거주하는 양반들 중 대표적 인물들이 총망라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청하현 일대에서 김씨와 이씨가 대표적인 사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향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17세기 말에 작성된 향안과 1767년에 重修한 향안에서도 김씨와 이씨가 여타 성씨에 비하여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두 성씨는 19세기까지 향청과 향교에서의 임원직을 돌아가며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18세기 중반이후부터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琴, 安, 郭, 尹氏 등의 성씨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들 성씨들이 나타는 경위를 알 수 없지만, 타읍에서 이주 내지 새로이 신분을 상승한 신향세력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청하일대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김씨들의 활동이 점차 축소되고, 이씨들의 향임 및 교임직 활동이 활발히 나타나는 것도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에 작성된 청하읍지에는 李, 金, 安, 崔, 郭, 鄭, 白氏가 나타나고 있다. 토성이었던 명씨와 속성인 주씨, 부곡성인 길씨는 나타나지 않는다. 부곡성인 길씨는 조선전기 향소부곡 등의 任內를 直村化 하면서 면·리 성씨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속성인 주씨는 웅천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직촌화 과정에서 州縣姓으로 편입 내지 타읍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 대개의 토성이족들이 그렇듯 사족화 과정에는 科擧, 軍功, 學問, 卓行 등이 중요한 수단이 되며, 그것은 또한 일정한 부와 학문적 기반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청하현의 재지사족 형성은 타읍에 비하여 늦게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세기 말에 작성된 청하읍지 인물조에는 문과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다. 다만, 生進試에 합격한 자가 3명 있으며, 그 외는 효행으로 이름을 남긴 자들이었다. 생진시 합격자는 김씨 2명과 이씨 1명이며, 효자, 효부들 역시 김씨, 이씨와 관련된 자들이었다. 청하현의 토성 중 이, 김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하였던 명씨는 임란이후 작성된 향안뿐만 아니라 읍지에서도 그 행적을 살펴볼 수 없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중반 청하현 일대의 대표적인 사족들의 명단으로 그 지역의 세력구도를 알 수 있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