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古來로 우리나라에서는 구성원 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큰 일이 있을 때 상부상조를 위한 각종 契 조직이 결성되어 왔다. 특히 조선시대 이후에는 선비들 간에 우애를 다지기 위한 각종 契會가 열리기도 하였다. 1721년 權斗經이 跋文을 쓰고 識한 「耆英會契軸 附同庚契帖」도 16세기 전반에 성된 계회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耆英會契軸 附同庚契帖」은 耆英會契와 同庚契에 참여했던 豊川任氏(任由謙, 任權)와 羅州丁氏(丁壽崗, 丁玉亨) 후손 중, 지금의 경상북도영주 지역에 세거하던 후손들의 주도로 제작되었다. 계축은 耆英會契軸과 同庚契軸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영회계축은 계원 명단, 서문, 詩, 발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경계축은 계원 명단, 立議, 識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기영회계축은 中宗 연간 致仕하고 耆老所에 들었던 일곱 신하들의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七老耆英會稧軸’이란 제목으로 만들어졌다. 가장 앞에는 七老인 安潤德(1457~1535), 高荊山(1453~1528), 李陌(1455~1528), 任由謙(1456~1527), 丁壽崗(1454~1527), 趙元紀(1457~1533), 李自堅(1454~1529)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으며, 字와 당시의 관직명이 이름 아래에 차례로 명기되어 있다. 7인의 생몰년으로 보아 기영회계는 1527년 무렵에 결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명단 다음에 수록된 계축의 서문은 기영회계의 일원으로 문장이 뛰어났던 이자견이 작성하였다. 서문에는 기영회계의 결성 목적과 의의가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우선 서문에서는 과거에 급제한 후 三朝에 걸쳐 두루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영예로운 관직에 오른 후 致仕하게 된 영예로움을 언급해 놓은 후, 老臣을 우대하기 위해 연회를 베풀어 준 임금의 은혜에 감사하고 있다. 이어 七老가 여생 동안 우애를 다질 수 있는 모임을 만들게 되었으니, 먼저 2월의 화창한 날에 안윤덕의 華筵이 열렸다며, 그때의 화려했던 풍경을 묘사해 놓았다. 華筵은 고형산, 이맥, 임유겸, 정수강, 이자견, 조원기의 순서대로 열렸다고 서문 마지막에 언급되어 있다. 서문 다음의 詩는 李荇(1478~1534)이 작성하였는데, 동일한 내용이 이행의 문집인 『容齋集』에 「七老契會圖」라는 제목의 七言古詩로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七老의 영예가 ‘동산의 사부(東山謝傅)’와 ‘영양의 학사(瀛洲學士)’에 부럽지 않다며 칭송하고, 그들의 업적과 七老의 모임을 기리는 내용이다.
기영회계축의 발문은 奉化酉谷 출신의 유학자 權斗經이 1721년에 작성하였는데, 기영회계축이 새롭게 제작되는 과정이 확인된다. 이에 따르면, 어느 날 同庚契의 친구인 任鳳擧가 題名된 두 폭의 큰 종이를 자신에게 보여주며 “이것은 우리 집안 선조의 兩世에 걸쳐 만들어진 契軸이다. 집안에 대대로 보관되어 왔으나 兵亂으로 잃어버렸는데, 근래에 당시 契家의 후손인 錦城丁氏 丁道敏(字 汝政)의 집에 소장되어 있어 처음으로 볼 수 있었다. 汝政의 선조는 參判公(丁壽崗)과 貳相公(丁玉亨)으로 우리 선조와 더불어 兩世 동안 집안끼리 交契해 오고 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임봉거와 정도민은 기영회계에 참여했던 임유겸과 정수강의 후손인데, 이들은 모두 지금의 경상북도영주 일대에 세거해 오고 있다. 나씨 가문에 전해져 오던 계축을 임씨 가문에서 처음으로 보게 되었고, 이를 새롭게 단장하여 권두경에게 이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선조인 判書府君(임유겸)이 나머지 여섯 군자와 더불어 七老耆英會를 결성하였고 다달이 연회를 열어 우애를 다졌으며, 이자견이 이를 기록하고 이행이 기념하는 시를 지었다고 설명해 주었다고 한다. 이에 당시 老臣들의 모임을 칭송하며 발문을 쓰게 된 것이다.
‘七老耆英會稧軸’ 다음에는 同庚契帖이 ‘成化丙午同庚稧軸’이라는 제목으로 부기되어 있다. 먼저 명단이 나열되어 있는데 蘇世讓, 丁玉亨, 曹漢弼, 任權, 許洽, 姜顯, 金守濬, 曹孝淵, 鄭世虎, 李認, 李弘幹, 黃汝獻, 金權, 表贇, 林鵬, 安秀岑, 權祺, 崔崇祖, 李躋, 太斗南, 申直 등 모두 21명이다. 이름 아래에는 字와 生月日이 세주로 기재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역시 세주로 과거 합격 연도 및 역임했던 최고관직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21명은 모두 成化丙午(1486)생 동갑이며, 이 모임이 결성된 것은 正德元年(1506)으로, 이들이 20세가 되던 해이다. 이들 대부분은 당시 서울에서 관직생활을 하거나, 또는 서울에서 서로 인연을 맺었던 인사들의 자제들로 그들끼리의 우애를 다지기 동경계를 결성했던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정옥형과 임권으로, 기영회계에 참여했던 정수강과 임유겸의 아들이다. 또한 1721년까지 영주에 세거하며 계축을 보관하고 있던 정도민과 권두경에게 글을 부탁한 임봉거는 모두 이들의 후손으로, 두 가문은 이때까지 계축에 이름을 올린 선조들의 우애를 계승해 오고 있었다.
명단 다음에는 동경계의 立議 11개조가 나열되어 있다. 입의의 내용 대부분은 상부상조와 관련된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관직에 나아간 同庚이 많은 부담을 진다는 점이다. 즉 父母夫妻의 喪 때, 祿을 받고 있는 자는 각기 正布 1필과 쌀 5두를 3일 내에 듣는 대로 부의하지만, 관직에 있는 자는 면포, 닥종이, 빈 섬, 촛불 등의 물건을 별도로 넉넉하게 부의하게 했다. 發靷 때에도 관직에 있는 자는 관청의 書吏를 보내어 영송케 했으며, 매 절기의 仲月 때에는 이들이 講信을 주도하였다. 妻父母와 兄弟의 喪 때에도 역시 넉넉하게 부의를 해야 했다. 먼저 관직에 진출한 만큼 다른 同庚보다 생활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부담을 많이 지어 서로 간에 우애를 다졌던 것이다. 운영과 관련해서는 有司를 2명 두었고 6개월마다 교체했다고 한다. 同庚 친구들 간의 친목을 위해 결성된 만큼, 계의 규정을 어겼었을 시 처벌은 齊馬首를 행하는 정도였다.
입의 다음에는 1721년 권두경이 동경계첩을 보고 識한 글이 수록되어 있다. 권두경은 識에서 먼저 임봉거의 말을 빌려 소세양을 비롯해 동경계 출신의 고위관직 역임자를 나열한 후, 처음에는 釋褐의 상태에서 결성되었으나 나중에 과거에 급제한 자가 17~18인이고, 廊廟에 오른 자도 4~5인이 된다며 계원들의 명성을 칭송하였다. 그리고 동경계에 이름을 올린 정옥형과 임권, 즉 나주정씨와 풍천임씨 양 가문은 선조의 우애를 이어 받아 2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있으니, 그 우애가 지속되기를 바라며 識를 마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왕조 이후 사족들은 상호 간의 결속력과 우애를 다지기 위해 각종 契會를 조직하였다. 耆老所에 들었던 인사들에 의해 결성된 七老耆英會稧와 1486년생 동년배들끼리 결성한 成化丙午同庚稧도 사족들 간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조직된 契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이러한 契 조직은 보급이 확산되어 가던 향약의 규정이 접목되어 감으로써, 자기규제와 상하질서를 표방하게 된다. 따라서 본 자료는 본격적으로 향약에 영향을 받기 이전, 계원 간의 상부상조와 우애를 강조하던 契 조직의 일면을 확인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