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8년에 작성한 청하현 양반들의 명단
내용 및 특징
향안은 해당 지역의 재지사족의 명단이라고 할 수 있다. 1698년에 작성된 청하현 향안은 당시 청하현 재지사족의 명단이 총망라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전하는 향안들은 대부분 17세기 이후에 작성된 것들로서 임란 당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향안에 입록되는 절차는 매우 까다로웠다. 반드시 사족이어야만 했고, 친족이나 외족, 처족에까지 신분적으로 문제가 없어야했다. 그만큼 향안은 신분적 폐쇄성을 주요 특징으로 하였다. 향안 작성에 관하여 정경세는 “향중에 향안이 있는 것은 세족(世族)을 변별(辨別)하기 위함이다. 세족을 변별함은 장차 그들로 하여금 일향(一鄕)에 기강을 세우고 민속을 바르게 하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향안은 재지사족의 공론에 따라 작성된 목록으로써, 재지사족의 신분적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다. 재지사족은 이 향안을 기반으로 향촌 사회를 지배하기 위한 장치로써 향회(鄕會)를 구성하고 운영하였다. 즉 향안의 작성은 그 지방 지배세력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이와 같이 향안의 기능은 재지사족을 결집시키고 향촌사회에서의 사족중심 체제를 유지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그러나 향안을 통해서 재지사족들이 지배구조를 계속 관철시키고자하는 움직임은 18세기에 이르러서 한계에 다다른다. 이는 재지사족이 경제적으로 성장한 농민층에 대한 지배를 효율적으로 하지 못하고, 사회적 변동 속에서 사족들의 물질적·경제적 토대가 취약해졌기 때문이다.
1698년에 작성된 청하향안에는 모두 40명이 입록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씨와 김씨 이다. 이 중 김씨는 25명으로 15명인 이씨들에 비하여 더 많은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다. 이는 청하지역에서 김씨들의 세력이 가장 강성하였음을 알려준다. 하지만, 이 지역에는 김씨와 이씨 외에도 기타 성씨가 존재하였다.
『세종실록지리지』을 보면, 15세기 중반 청하현에는 이(李), 김(金), 명(明)씨의 토성과 주(朱), 정(鄭)씨의 속성, 남계부곡에 길(吉)씨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작성된 청하읍지에는 이, 김, 안(安), 최(崔), 곽(郭), 정, 백(白)씨만이 나타나고 있다. 토성이었던 명씨와 속성인 주씨, 부곡성인 길씨는 나타나지 않는다. 부곡성인 길씨는 조선전기 향소부곡 등의 임내(任內)를 직촌화(直村化) 하면서 면·리 성씨에 편입된 것으로 보인다. 속성인 주씨는 웅천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직촌화 과정에서 주현 성(姓)으로 편입 내지 타읍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전기 대개의 토성이족들이 그렇듯 사족화 과정에는 과거(科擧), 군공(軍功), 학문, 탁행(卓行) 등이 중요한 수단이 되며, 그것은 또한 일정한 부와 학문적 기반 위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이런 면에서 청하현의 재지사족 형성은 타읍에 비하여 늦게 형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9세기 말에 작성된 청하읍지 인물조에는 문과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다. 다만, 생진시(生進試)에 합격한 자가 3명 있으며, 그 외는 효행으로 이름을 남긴 자들이었다. 생진시 합격자는 김씨 2명과 이씨 1명이며, 효자, 효부들 역시 김씨, 이씨와 관련된 자들이었다. 청하현의 토성 중 이, 김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하였던 명씨는 임란이후 작성된 향안뿐만 아니라 읍지에서도 그 행적을 살펴볼 수 없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후반 청하현 일대의 대표적인 사족들의 명단으로 그 지역의 세력구도를 알 수 있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