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0년 경산향교에서 儒生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작성한 慶山官儒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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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및특징
1680년 경산향교에서 향교 소속의 유생들 명단을 기록하여 작성한 慶山官儒案이다. 경산향교는 고려공양왕 2(1390)년에 건립되었다고 하며, 조선명종 5(1550)년에 1차 重修하였고, 壬辰亂에 비록 兵火를 모면하기는 했으나 건물의 파괴가 적지 않아서 인조 11(1633)년에 2차 重修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전히 산사태의 위험과 오래된 건물의 노후화가 근심이 되었으므로 마침내 숙종 7(1681)년에 新橋洞으로 옮기고 重建하였다. 본 慶山官儒案은 이처럼 숙종 7년의 移建重修를 앞두고 作成된 것이어서 移建重修 당시에 重建의 책임을 맡았던 사람들의 명단이 많이 보이고 있다. 이 명단은 우선 額外儒生과 額內儒生을 구분하여 기재하였으며 또 15세 이하의 儒生에 해당하는 童蒙을 따로 기재하고 있다. 우선 額內儒生을 보면, 李汝楫․韓弘毅․鄭世誾등 11명의 인명을 기재하였고, 額外儒生으로는 殷相尹․殷省三․殷益三등 14명의 인명을 기재하고 있다. 이 밖에 童蒙으로는 朴世章․崔明哲․崔明元등 3명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이 명단중에서 李汝楫은 바로 1년 뒤의 移建重修工役에서 燔瓦都監을 맡았고, 移建工役時 造成都監은韓弘翊이, 有司로는 韓弘毅․鄭世誾등이 맡아서 활약하였다. 이로 미루어 보면 이 문서의 끝에 기록되어 있는 齊任의 서명, 鄭․韓등은 鄭世誾과 韓弘翊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世宗實錄地理誌나 新增東國輿地勝覽등의 姓氏條를 살펴보면 土姓으로 金․全․白氏등이 기재되어 있으나 이 1681년의 慶山官儒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이들 土姓은 麗末鮮初까지 慶山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他姓에게 영향력을 내주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18세기에 慶山에서 점차 영향력을 가지게 된 姓氏로는 鄭氏․韓氏․蔣氏․徐氏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료적가치
慶山鄕校의 경우, 보존되어 있는 校任案등이 없고, 이 1680년의 儒案과 1689년의 儒案이 겨우 전하며, 기타 자료로는 正神門의 重修記 2편만이 전하기 때문에 이 儒案은 朝鮮後期慶山鄕校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비교적 귀중한 자료라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