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이 儒案은 1629년에 작성된 것으로 액내유생 49명과 액외유생 9명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額外’를 명기하여 구분하던 이전과는 달리 행을 띄워서 액외교생의 명단을 적고 있다. 1629년 儒案의 경우 액내 49명 중 10명의 入格을 細註로 밝히고 있다. 반면 액외의 경우 단 1명도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데서 상기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유안에 나오는 액내교생의 성씨를 살펴보면 李氏 15명, 金氏 5명, 鄭氏 5명, 曺氏 4명, 朴·成·孫氏 각 3명, 崔·徐氏 각 2명, 安·趙·盧·全·尹·柳氏가 각 1명씩 나타난다. 액외교생으로는 曺氏 2명, 李氏 2명, 田氏 1명, 權氏 1명, 崔氏 1명, 河氏 1명, 辛氏 1명이 있다. 이들 성씨를 이전에 작성된 두 儒案과 비교해보면 액내교생은 15명, 액외교생은 6명이 중복되고 있다. 이들을 제외하고 추록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액내는 34명, 액외는 3명이 있다. 추록된 인물들은 기존 유안의 교생들과 비교했을 때 인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록된 자들을 성씨별로 구분해 보면 李氏 7명, 鄭氏 5명, 金氏 4명, 成·孫·曺씨가 각 3명이며, 崔·朴氏 각 2명, 安·趙·徐·盧氏가 각 1명이다. 추록인들 중 입격자는 6명으로 나타난다. 즉, 대부분의 성씨에서 이전의 유안과 비교하여 액내교생의 수가 증가하고 있지만 全氏, 尹氏, 柳氏 등은 동일인물이 기재되어 있으며, 盧氏, 安氏, 趙氏, 徐氏, 등은 각 1명씩 증가하여 타 성씨들에 비하여 그 세력이 미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韓氏의 경우 1618년 유안에 1명이 등재되고는 이후에 작성된 유안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張氏 역시 나타나지 않고 있다. 權氏의 경우에도 액내교생은 없는 반면, 액외교생만이 계속해서 訓導의 직임을 유지하고 있고, 9명 중 6명이 중복되는 것으로 보아 액외교생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변동없이 유지되며, 세습의 성격을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액외교생은 서얼과 평민들 중 일정한 소양과 경제력을 갖춘 이들이었다. 이러한 액외교생이 訓導의 직임을 맡고 있었던 것은 그 일이 양반사족들의 몫인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이 아닌 지방 관서 내지 중앙의 관청의 전문직 종사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액외교생은 뒷날 서재교생으로서 불리면서 향교의 제의와 수직 등의 임무 외에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지방 官署의 업무에 필요한 인원을 향교 교생들 중 선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복 기재된 액외교생들 중 1618년 유안에 등재된 이가 5명이며, 이중 4명은 1622년 유안에도 기재된 자들이다. 1618년 유안에만 기록된 徐强仁은 1622년의 유안에서 누락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딸이 경주손씨에게 혼인을 하여 조선 중기 때의 문신인 孫汝濟를 낳았으며, 張顯光의 문인으로서 祭文을 지은 점 등으로 보아 일찍부터 달성서씨는 영천지역으로 이주해 와서 주변지역의 사족들과 혼인을 통한 교류 및 적극적인 학문 활동을 통해 재지사족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간 것으로 보인다. 全知性은 龍宮全氏로서 영천 입향조는 全永昌이다. 그는 15세기 중반 世祖의 왕위 찬탈 때 관직을 버리고 永川의 林泉里에 隱居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昌寧曺氏, 安東權氏, 星山李氏, 咸陽朴氏, 延日鄭氏, 慶州金氏, 慶州孫氏, 永陽崔氏, 永川李氏, 慶州鄭氏 등과 혼인을 맺으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지성의 유안 입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부친인 全三益의 임란 전공과 본인의 入格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새로 입록한 액외교생 3명 중 曺永孝, 曺奉孝은 액내교생 중 조윤효, 조진효 등과 항렬이 같은 것으로 보아 서얼출신으로 짐작된다.
인물들 중 액내의 尹後焞은 ‘納粟’이라 되어 있다. 액내교생의 신분이 양반사족임을 감안할 때 대개의 납속은 實職除授 받기 위한 조처로 보지만, 이들은 관직 유무가 세주에 나오지 않는 점과 인조 5년 營將事目 반포 이후에 세주가 작성된 것으로 보아서 납속을 통한 免講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납속을 통한 免講교생은 증가 추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인조 14년에 작성된 영천향교 免講校生案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결국 이들은 考講을 통한 군역을 면하기 위해 납속한 것이다.
15세기 중엽의 『世宗實錄地理志』에 나오는 영천군의 土姓으로는 皇甫·申·李·尹氏가, 來姓은 宋·金·兪·崔·沈氏 등 총 9개의 성씨가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작성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克氏와 1497년 신령현이 廢縣되어 영천군에 귀속되면서 신령의 토성이었던 李․朴․丁․史氏가 영천의 來姓으로 등장하여 총 14개의 성씨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작성된 『嶺南邑誌』에서는 기존의 皇甫氏, 李氏, 尹氏, 申氏 宋氏, 金氏, 克氏, 兪氏, 崔氏, 沈氏 등의 10개 성씨와 신령에서 來幷한 李․朴․丁․史氏의 4개 성씨,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지만 과거에 增補된 曺氏, 鄭氏, 徐氏, 權氏, 安氏, 成氏, 朴氏, 孫氏, 辛氏, 郭氏, 柳氏, 金氏, 盧氏, 田氏, 趙氏 등의 15개 來姓이 나타난다. 대개 邑誌에 등장하는 성씨들이 당시 校院을 출입하던 성씨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모두 士族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을 보았을 때 영천에는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성씨가 유안에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천의 토성인 皇甫, 李, 尹, 申氏는 모두 조선시대 사족으로 나타나지만 유안에는 皇甫氏와 申氏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황보씨는 鄕案에서도 입록된 자가 없다. 황보씨의 시조는 고려 초의 豪族으로 나오지만, 관인으로 발전한 시기는 고려 말부터였다. 15세기 초 한때 가세가 크게 일었지만, 世祖의 등극으로 일문이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李氏는 고려 중기부터 상경종사하는 관인이 계속되었고 재지세력도 번성하여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어 갔다. 영천이씨는 사족과 이족이 함께 족세가 번창하여 각파에서 상경종사하면서 京鄕 각지에 분포되었는데, 그 중에 李賢輔 일파는 선초 영천에서 예안현汾川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대표적인 사림가문으로 발전하였다. 尹氏와 申氏도 조선시대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성씨들 외에도 영천에는 다른 지역에서 移住한 성씨가 儒案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來姓의 하나인 崔氏는 고려후기 이래 士族과 吏族을 다 갖추었던 가문이었다. 고려 말의 鄭夢周는 外家인 영천에서 생장하였고, 上京從仕 후에도 그 일족은 잔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李滉의 문도가 된 曺好益은 16세기 후반에 창원에서 영천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영천에서 번성하였다. 바로 이들 來姓이 영천향교의 운영에 一翼을 담당하였음을 유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향교의 교임은 대체로 동재의 청금유생들 가운데서 수임인 都有司(校長, 齋長, 齋首), 차임인 掌議(校貳), 말임인色掌(有司, 齋有司, 齋任)이 선출되었다. 1629년의 유안에서도 도유사, 장의, 유사의 순으로 교임들의 명단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1618년과 1622년의 儒案에서는 堂長, 掌議, 有司의 순으로 校任들이 나타나고 있다. 흔히 堂長은 서재교생들의 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들의 대표를 堂長이라고 불렀다. 이는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나눠지던 17세기 중반 이전에 儒案이 작성되면서 당시 영천향교의 액내유생 즉 양반유생의 대표를 堂長이라 불렀으며, 17세기 중반이후 액내유생이 양반사족이 아닌 평민, 서얼들의 서재교생을 칭하게 되자 堂長이라는 말은 서재교생의 대표를 칭하는 것으로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즉 1618년의 유안이 작성될 당시의 堂長은 양반유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619년에 작성된 ‘鄕約案’에서 ‘鄕校卽上有司主之’라 한 것으로 보아 향교를 대표하는 수임인 都有司를 上有司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상유사를 비롯한 교임은 대개 향교에 적을 둔 유생 가운데 文行이나 德行을 갖추고 고을의 명망을 받아 사장이 될 만한 인물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흔히 사류의 영수로 일컬어졌다. 따라서 유안에 등재된 인물들 중에서 교임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향약안에서는 堂長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堂長이라는 표현은 향교내부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대외적으로는 上有司라는 불렸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자체의 문서 등에서 堂長이라 사용한 것은 이 유안이 작성되던 1618년의 영천향교에는 壬辰倭亂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동재와 서재만이 중수되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에 명륜당이 중수되면서 향교의 대략적인 모습은 갖춰졌지만, 불탔던 대성전은 1622년 9월에 가서야 완전히 중수될 수 있었다. 실제 영천향교의 유안들 중 1622년까지 작성된 유안에서는 首任으로 堂長이 나오며, 1629년 유안에서는 都有司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를 종합해 본다면, 영천향교의 首任인 都有司는 上有司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향교건물이 완전히 갖춰지기 이전에는 堂長으로 불리었다고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유안은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구분이 불명확해지는 과도기에 작성된 것으로 이전의 유안과 비교하면, 영천지역내 향권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교안의 변천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이들 유안에 등재된 액내교생들은 영천의 양반사족들 중에서 선발된 자들로 유안이 작성되던 당시에 영천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자들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