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7년에 장기향교에서 작성된 鄕案
鄕案
내용 및 특징
본 문서는 1627년에 장기향교에서 작성한 향안이다. 최초의 작성연도가
1627년(天啓7年,인조5년)6월이라고 기재되어 있긴 하지만, 기재된 인명의 앞에 모두 ‘仙’자가 기록되어 있으므로 기록한 사람은 명단에는 없는 인물이라고 생각된다. 1627년이라면 임진왜란이 끝난 지 불과 3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는데, 다시 정묘호란이 발발했던 해이다. 장기현은 청나라 군대가 침입한 지점에서는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어느 정도 심리적 영향은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사림양반들은 흔들리는 향촌의 지배를 보다 확고히 하기 위해 이 향안을 작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향안이 작성된 이후, 1656(丙申年,효종7)․1658(戊戌年,효종9)․1669(己酉年,현종10년)년에 계속해서 추가로 명단이 입록되었다. 최초로 작성된 1627년에는 李氏가 5명, 徐氏가 4명, 皇甫氏가 2명, 吳氏가 2명, 安씨가 2명, 鄭氏가 1명 입록되어 있다. 따라서 유안과 마찬가지로 향안에서도 장기현에서 李氏가 큰 세력을 가졌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특이하게 徐氏가 李氏 다음으로 많이 입록되어 있다. 그러나 1658년의 향안에서는 吳氏가 5명이나 입록되어 있음에 반해, 徐氏가 2명만 입록되어 있으므로 鄕中의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료적가치
본 향안의 명단을 살펴보면 임란․정묘․병자호란 이후, 향교가 많이 위축되었다고 하나 여전히 향촌지배에서 향교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가령 來姓인 李氏는 유안에도 많이 입록된 성씨인데 장기현에서 크게 문중의 역량을 떨쳤음을 알 수 있다. 士姓이었던 吳氏는 유안에는 많이 나타나지 않지만, 향안에는 적지 않은 이름을 올리고 있는 점으로 보아 장기현에서 여전히 세력 있는 문중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의 향촌사회에서도 향안의 명단이나 향교의 교임 등이 각 가문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