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이 儒案은 1622년에 작성된 것으로, 1629년 유안의 뒤편 첨부되어 있다. 인물은 액내유생 41명과 액외유생 12명이 수록되어 있다. 영천향교의 儒案은 액내, 액외로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구별되어 액내교생에 평민과 서얼이 입교하는 구분이 생기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서, 양반이 출입하는 동재유생만을 적은 청금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향교의 교생, 즉 유생을 칭하면서 액내교생으로 존재할 당시의 교생명단을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仁祖朝 충청감사鄭良弼이 양남의 각 읍에서는 액내·액외교생, 童蒙으로 구별하여 儒라고 이름 하는 자들은 모두 校籍에 올리고 있다고 한 것과 부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천의 향교 유안 액내에 등재된 자들은 당시 영천향교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었던 양반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액외는 평민, 혹은 서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22년 儒案의 경우 액내 41명 중 生員 1명, 2명의 文科, 12명의 입격을 細註로 밝히고 있다. 반면 액외의 경우 단 1명도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데서 상기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유안에 나오는 액내교생의 성씨를 살펴보면 李氏 14명, 金氏 6명, 鄭氏 5명, 朴·柳·曺氏 각 2명, 徐·盧·田·安·張·尹·成·崔·全氏가 각 1명씩 나타난다. 액외교생으로는 柳氏 2명, 曺氏 2명, 李氏 1명, 金氏 1명, 田氏 1명, 權氏 1명, 孫氏 1명, 崔氏 1명, 河氏 1명, 辛氏 1명이 있다. 이들 성씨를 1618년 儒案과 비교해보면,
액내교생은 16명, 액외교생은 7명이 중복되고 있다. 이들을 제외하고 추록된 인물들을 살펴보면 액내는 25명, 액외는 5명이 있다. 추록된 인물들은 기존 유안의 교생들과 姓名 등을 비교했을 때 친인척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록된 자들을 성씨별로 구분해 보면 이씨 8명, 김씨 6명, 류씨 2명, 정·노·박·전·윤·최·조·안씨가 각 1명씩이다. 추록인들 중 입격자는 6명, 생원 1명, 문과 1명으로 나타난다. 특히 새롭게 액내교생으로 나타나는 최씨와 전씨는 각기 문과와 입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체 문과 합격자 2명 중 利川徐氏 徐沃은 이전 儒案에서도 나타나는 인물로서 이 유안에서는 文科에 급제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文科榜目에서는 확인이 불가능하며, 邑誌에서는 武科에 급제 한 것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誤記인 것으로 보인다. 永川崔氏 崔友稷은 1629년의 別試에 及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어서 細註의 文科 표시는 1629년도에 儒案을 작성하면서 기재한 것으로 보인다. 입격자들 중 새롭게 나타난 全知性은 龍宮全氏로서 영천 입향조는 全永昌이다. 그는 15세기 중반 世祖의 왕위 찬탈때 관직을 버리고 永川의 林泉里에 隱居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昌寧曺氏, 安東權氏, 星山李氏, 咸陽朴氏, 延日鄭氏, 慶州金氏, 慶州孫氏, 永陽崔氏, 永川李氏, 慶州鄭氏 등과 혼인을 맺으면서 점차 세력을 확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지성의 유안 입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부친인 全三益의 임란 전공과 본인의 入格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추록된 인물들 중 액내의 朴映, 尹後焞과 액외의 曺克孝는 ‘納粟’이라 되어 있다. 액내교생의 신분이 양반사족임을 감안할 때 대개의 납속은 實職除授 받기 위한 조처로 보지만, 이들은 관직 유무가 세주에 나오지 않는 점과 인조 5년 營將事目 반포 이후에 세주가 작성된 것으로 보아서 납속을 통한 免講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 유안은 1629년, 즉 인조 7년에 작성된 유안과 合本되어 있는데, 이 유안에 기재된 세주들도 이때에 작성되었음을 앞서 최우직의 급제 사실에서 확인되었다. 이러한 납속을 통한 免講교생은 액내·외를 막론하고 증가 추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실제 인조 14년에 작성된 영천향교 免講校生案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결국 이들은 考講을 통한 군역을 면하기 위해 납속한 것이다.
1618년 儒案과 비교하여 權·孫·韓氏는 액내교생에 追錄된 이들이 없었다. 이는 이들 세 성씨가 여타의 성관들에 비해 영천내에서의 세력이 미비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권씨와 손씨는 액외교생으로 각 1명씩이 추록되고 있는데, 權中立은 중복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전 유안에는 없던 訓導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액외교생의 신분이 평민 내지 서얼층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 訓導란 직책은 양반사족들이 담당하였던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이 아닌 지방 관서 내지 중앙의 관청의 전문직 종사자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액외교생은 뒷날 서재교생으로서 불리면서 향교의 제의와 수직 등의 임무 외에 수령의 업무를 보좌하기도 했는데, 이처럼 지방 官署의 업무에 필요한 인원을 향교 교생들 중 선발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22년 유안에 나오는 액외교생들 중 중복되지 않는 이들의 성씨를 분석하면 李氏 2명, 曺氏 2명, 孫氏 1명, 田氏 1명이다. 이들 성씨는 이전 유안에서 액내교생이 등장하고 있기에 짐작컨대 이들의 신분은 서얼로 보인다. 河氏와 辛氏의 경우 이전부터 액외교생만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평민들 중 일정한 소양과 경제력을 갖춘 이들로서 액내교생을 세습하는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15세기 중엽의 『世宗實錄地理志』에 나오는 영천군의 土姓으로는 皇甫·申·李·尹氏가, 來姓은 宋·金·兪·崔·沈氏 등 총 9개의 성씨가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작성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克氏와 1497년 신령현이 廢縣되어 영천군에 귀속되면서 신령의 토성이었던 李․朴․丁․史氏가 영천의 來姓으로 등장하여 총 14개의 성씨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작성된 『嶺南邑誌』에서는 기존의 皇甫氏, 李氏, 尹氏, 申氏 宋氏, 金氏, 克氏, 兪氏, 崔氏, 沈氏 등의 10개 성씨와 신령에서 來幷한 李․朴․丁․史氏의 4개 성씨,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지만 과거에 增補된 曺氏, 鄭氏, 徐氏, 權氏, 安氏, 成氏, 朴氏, 孫氏, 辛氏, 郭氏, 柳氏, 金氏, 盧氏, 田氏, 趙氏 등의 15개 來姓이 나타난다. 대개 邑誌에 등장하는 성씨들이 당시 校院을 출입하던 성씨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모두 士族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을 보았을 때 영천에는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성씨가 유안에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천의 토성인 皇甫, 李, 尹, 申氏는 모두 조선시대 사족으로 나타나지만 유안에는 皇甫氏와 申氏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황보씨는 鄕案에서도 입록된 자가 없다. 황보씨의 시조는 고려 초의 豪族으로 나오지만, 관인으로 발전한 시기는 고려 말부터였다. 15세기 초 한때 가세가 크게 일었지만, 世祖의 등극으로 일문이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李氏는 고려 중기부터 상경종사하는 관인이 계속되었고 재지세력도 번성하여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어 갔다. 영천이씨는 사족과 이족이 함께 족세가 번창하여 각파에서 상경종사하면서 京鄕 각지에 분포되었는데, 그 중에 李賢輔 일파는 선초 영천에서 예안현汾川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대표적인 사림가문으로 발전하였다. 尹氏와 申氏도 조선시대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성씨들 외에도 영천에는 다른 지역에서 移住한 성씨가 儒案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來姓의 하나인 崔氏는 고려후기 이래 士族과 吏族을 다 갖추었던 가문이었다. 고려 말의 鄭夢周는 外家인 영천에서 생장하였고, 上京從仕 후에도 그 일족은 잔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李滉의 문도가 된 曺好益은 16세기 후반에 창원에서 영천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영천에서 번성하였다. 바로 이들 來姓이 영천향교의 운영에 一翼을 담당하였음을 유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향교의 교임은 대체로 동재의 청금유생들 가운데서 수임인 都有司(校長, 齋長, 齋首), 차임인 掌議(校貳), 말임인色掌(有司, 齋有司, 齋任)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1618년의 儒案에서는 堂長, 掌議, 有司의 순으로 校任들이 나타나고 있다. 흔히 堂長은 서재교생들의 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들의 대표를 堂長이라고 불렀다. 이는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나눠지던 17세기 중반 이전에 儒案이 작성되면서 당시 영천향교의 액내유생 즉 양반유생의 대표를 堂長이라 불렀으며, 17세기 중반이후 액내유생이 양반사족이 아닌 평민, 서얼들의 서재교생을 칭하게 되자 堂長이라는 말은 서재교생의 대표를 칭하는 것으로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즉 1618년의 유안이 작성될 당시의 堂長은 양반유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619년에 작성된 ‘鄕約案’에서 ‘鄕校卽上有司主之’라 한 것으로 보아 향교를 대표하는 수임인 都有司를 上有司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상유사를 비롯한 교임은 대개 향교에 적을 둔 유생 가운데 文行이나 德行을 갖추고 고을의 명망을 받아 사장이 될 만한 인물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흔히 사류의 영수로 일컬어졌다. 따라서 유안에 등재된 인물들 중에서 교임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향약안에서는 堂長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堂長이라는 표현은 향교내부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대외적으로는 上有司라는 불렸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자체의 문서 등에서 堂長이라 사용한 것은 이 유안이 작성되던 1618년의 영천향교에는 壬辰倭亂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동재와 서재만이 중수되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에 명륜당이 중수되면서 향교의 대략적인 모습은 갖춰졌지만, 불탔던 대성전은 1622년 9월에 가서야 완전히 중수될 수 있었다. 실제 영천향교의 유안들 중 1622년까지 작성된 유안에서는 首任으로 堂長이 나오며, 1629년 유안에서는 都有司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를 종합해 본다면, 영천향교의 首任인 都有司는 上有司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향교건물이 완전히 갖춰지기 이전에는 堂長으로 불리었다고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유안은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분기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액내·외 교생의 성격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여기에 등재된 액내교생들은 영천지역내 많은 양반사족들 중에서 선발된 자들로 유안이 작성되던 당시에 영천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후에 작성되는 儒案들과 비교해 봄으로서 영천지역내 향권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