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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유안(儒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XG.1618.4723-20110630.Y111040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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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주체 영천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46-1
작성시기 1618
형태사항 크기: 24 X 18
판본: 필사본
수량: 9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영천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천 영천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지당길 5(교촌동)

안내정보

1618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유안(儒案)
이 유안은 1618년에 작성된 것으로 액내유생 50명과 액외유생 10명이 수록되어 있다. 법규로 지정된 영천향교의 정원은 50명이었는데 액내란 것은 정원 안의 인원을, 액외는 정원 밖의 인원을 나타낸다. 영천향교의 유안은 액내, 액외로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구별되어 액내교생에 평민과 서얼이 입교하는 구분이 생기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서, 양반이 출입하는 동재유생만을 적은 청금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향교의 교생, 즉 유생을 칭하면서 액내교생으로 존재할 당시의 교생명단을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영천의 향교 유안 액내에 등재된 자들은 당시 영천향교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었던 양반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액외는 평민, 혹은 서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18년 유안의 경우 액내 50명 중 1명의 문과합격자와 10명의 소과합격자가 나오고 있다. 반면 액외의 경우 단 1명도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데서 상기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유안에 나오는 액내유생의 성씨를 살펴보면 이씨 15명, 정씨 11명, 김·박·서씨 각 3명, 류·조·노·전씨 각 2명, 안·장·윤·성·권·손·한씨가 각 1명씩 나타난다. 액외유생으로는 김씨 2명, 류씨 2명, 조씨 1명, 권씨 1명, 최씨 1명, 조씨 1명, 하씨 1명, 신씨 1명이 있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96
이병훈

상세정보

1618년에 작성된 영천향교 유안으로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의 구분이 있기 전의 액내·외교생의 명부이다.
내용 및 특징
이 儒案은 1618년에 작성된 것으로 액내유생 50명과 액외유생 10명이 수록되어 있다. 영천향교의 儒案은 액내, 액외로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구별되어 액내교생에 평민과 서얼이 입교하는 구분이 생기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서, 양반이 출입하는 동재유생만을 적은 청금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향교의 교생, 즉 유생을 칭하면서 액내교생으로 존재할 당시의 교생명단을 지칭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은 仁祖충청감사鄭良弼이 양남의 각 읍에서는 액내·액외교생, 동몽으로 구별하여 儒라고 이름 하는 자들은 모두 校籍에 올리고 있다고 한 것과 부합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영천의 향교 유안 액내에 등재된 자들은 당시 영천향교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었던 양반들이라고 볼 수 있으며, 액외는 평민, 혹은 서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18년 儒案의 경우 액내 50명 중 1명의 문과, 10명의 入格나오고 있다. 반면 액외의 경우 단 1명도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데서 상기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유안에 나오는 액내유생의 성씨를 살펴보면 李氏 15명, 鄭氏 11명, 金·朴·徐氏 각 3명, 柳·曺·盧·田氏 각 2명, 安·張·尹·成·權·孫·韓氏가 각 1명씩 나타난다. 액외유생으로는 金氏 2명, 柳氏 2명, 曺氏 1명, 權氏 1명, 崔氏 1명, 趙氏 1명, 河氏 1명, 辛氏 1명이 있다. 15세기 중엽의 『世宗實錄地理志』에 나오는 영천군의 土姓으로는 皇甫·申·李·尹氏가, 來姓은 宋·金·兪·崔·沈氏 등 총 9개의 성씨가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작성된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克氏와 1497신령현이 廢縣되어 영천군에 귀속되면서 신령의 토성이었던 李․朴․丁․史氏가 영천의 來姓으로 등장하여 총 14개의 성씨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작성된 『嶺南邑誌』에서는 기존의 皇甫氏, 李氏, 尹氏, 申氏 宋氏, 金氏, 克氏, 兪氏, 崔氏, 沈氏 등의 10개 성씨와 신령에서 來幷한 李․朴․丁․史氏의 4개 성씨, 정확한 유래를 알 수 없지만 과거에 增補된 曺氏, 鄭氏, 徐氏, 權氏, 安氏, 成氏, 朴氏, 孫氏, 辛氏, 郭氏, 柳氏, 金氏, 盧氏, 田氏, 趙氏 등의 15개 來姓이 나타난다. 대개 邑誌에 등장하는 성씨들이 당시 校院을 출입하던 성씨였음을 감안한다면 이들은 모두 士族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을 보았을 때 영천에는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성씨가 유안에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천의 토성인 皇甫, 李, 尹, 申氏는 모두 조선시대 사족으로 나타나지만 유안에는 皇甫氏와 申氏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황보씨는 鄕案에서도 입록된 자가 없다. 황보씨의 시조는 고려 초의 豪族으로 나오지만, 관인으로 발전한 시기는 고려 말부터였다. 15세기 초 한때 가세가 크게 일었지만, 世祖의 등극으로 일문이 몰락한 것으로 보인다. 李氏는 고려 중기부터 상경종사하는 관인이 계속되었고 재지세력도 번성하여 사족과 이족으로 분화되어 갔다. 영천이씨는 사족과 이족이 함께 족세가 번창하여 각파에서 상경종사하면서 京鄕 각지에 분포되었는데, 그 중에 李賢輔 일파는 선초 영천에서 예안현汾川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대표적인 사림가문으로 발전하였다. 尹氏와 申氏도 조선시대 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성씨들 외에도 영천에는 다른 지역에서 移住한 성씨가 儒案에 많이 등장하고 있다. 來姓의 하나인 崔氏는 고려후기 이래 士族과 吏族을 다 갖추었던 가문이었다. 고려 말의 鄭夢周는 外家인 영천에서 생장하였고, 上京從仕 후에도 그 일족은 잔류하고 있었다. 그리고 李滉의 문도가 된 曺好益은 16세기 후반에 창원에서 영천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후손들이 영천에서 번성하였다. 바로 이들 來姓이 영천향교의 운영에 一翼을 담당하였음을 유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향교의 교임은 대체로 동재의 청금유생들 가운데서 수임인 都有司(校長, 齋長, 齋首), 차임인 掌議(校貳), 말임인色掌(有司, 齋有司, 齋任)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1618년의 儒案에서는 堂長, 掌議, 有司의 순으로 校任들이 나타나고 있다. 흔히 堂長은 서재교생들의 직임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그들의 대표를 堂長이라고 불렀다. 이는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나눠지던 17세기 중반 이전에 儒案이 작성되면서 당시 영천향교의 액내유생 즉 양반유생의 대표를 堂長이라 불렀으며, 17세기 중반이후 액내유생이 양반사족이 아닌 평민, 서얼들의 서재교생을 칭하게 되자 堂長이라는 말은 서재교생의 대표를 칭하는 것으로 성격이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즉 1618년의 유안이 작성될 당시의 堂長은 양반유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619년에 작성된 ‘鄕約案’에서 ‘鄕校卽上有司主之’라 한 것으로 보아 향교를 대표하는 수임인 都有司를 上有司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상유사를 비롯한 교임은 대개 향교에 적을 둔 유생 가운데 文行이나 德行을 갖추고 고을의 명망을 받아 사장이 될 만한 인물이 선출되었기 때문에 흔히 사류의 영수로 일컬어졌다. 따라서 유안에 등재된 인물들 중에서 교임이 배출되었을 것이다. 향약안에서는 堂長이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이는 堂長이라는 표현은 향교내부에서 사용되는 것이며 대외적으로는 上有司라는 불렸던 것으로 짐작해 볼 수도 있다. 이들이 자체의 문서 등에서 堂長이라 사용한 것은 이 유안이 작성되던 1618년의 영천향교에는 壬辰倭亂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고 동재와 서재만이 중수되었었기 때문이다. 이듬해에 명륜당이 중수되면서 향교의 대략적인 모습은 갖춰졌지만, 불탔던 대성전1622년 9월에 가서야 완전히 중수될 수 있었다. 실제 영천향교의 유안들 중 1622년까지 작성된 유안에서는 首任으로 堂長이 나오며, 1629년 유안에서는 都有司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를 종합해 본다면, 영천향교의 首任인 都有司는 上有司라 불리기도 하였으며, 향교건물이 완전히 갖춰지기 이전에는 堂長으로 불리었다고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유안은 동재유생과 서재교생이 분기되기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액내·외 교생의 성격에 대하여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여기에 등재된 액내교생들은 영천지역내 많은 양반사족들 중에서 선발된 자들로 유안이 작성되던 당시에 영천지역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자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이후에 작성되는 儒案들과 비교해 봄으로서 영천지역내 향권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서 그 가치가 높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永川邑誌(嶺南邑誌),
永川全誌, 尹聖永 編, 일광인쇄소(대구), 1939
이병훈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18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유안(儒案)
萬曆四十六年
儒案
儒案
安琠
朴曾孝
盧喆
朴[日+粲]
李繼老
韓九思
李礸
李德老
鄭守道
鄭憲道
曹宗孝
李煜
柳敬修
鄭繼緖
李神龍
柳葆
李好榮
孫繼昌
鄭璧
鄭良佑
盧珏
鄭喩道
李是楨 入格
金靖
進士 李時華
李喜榮
在喪 鄭邦柱
權崶 入格
鄭壂
金汝礪
田汝翼 入格
金潤身 入格
徐鍵
田得南 入格
鄭弘道
成以寬 入格
李如海 入格
朴舜孝
李是檼 入格
徐强仁
文科 鄭好仁
李尙中
李時榮
曹汝誼 入格
尹後焞
鄭興男
李時煥
徐沃
張灝
李廷老
額外
在喪 河達海
金孝立
崔尙好
柳安世
柳承立
權中立
辛儀鳳
趙敦仁
曹處仁
金悌立

萬曆四十六年七月日 堂長 安
掌議 李 手決
有司 李 手決
金 手決
郡守 手決
郡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