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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영양향교(英陽鄕校) 통고(通告)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XF.1897.4776-20110630.Y1111309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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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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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고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고
작성주체 영양 영양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영양향교
작성시기 1897
형태사항 크기: 38 X 3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영양향교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영양향교

안내정보

1897년 영양향교(英陽鄕校) 통고(通告)
1897영양 영양향교에서 고종(高宗)의 러시아 영사관 피신을 반대하고 국가위신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환궁을 해 주기를 조정에 청원하는 내용의 통고문(通告文)을 경상도일대의 유생들에게 전파하였다. 본 통고문의 내용에 의하면, 고종(高宗)러시아영사관에 피신한지 1년이 다 되어가므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열강 각국이 이권쟁탈에 혈안이 되는 등, 국가의 체통이 말이 아니므로 선혜청에 소회(疏會)를 설치하여 임금의 환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다고 하였다. 아울러 국모(國母)가 비참하게 희생된지 3년이 지났으니 신하된 도리로 반드시 이 원수를 갚는 일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내용의 통고문을 경상도일대의 유생들에게 전파했는데 상소의 우두머리로는 조성황(趙性黃)조성훈(趙性薰)채광묵(蔡光黙)등이 역할을 맡았고, 도청(都廳)의 책임자로는 정회규(鄭會圭)가, 상소문의 소요 경비관계를 책임지는 장재(掌財)의 책임은 이민석(李敏錫)이범석(李範錫)등이 맡았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

상세정보

1897영양 영양향교에서 高宗의 還宮을 요구하는 儒疏에 참여할 것을 儒生들에게 호소하는 通告文.
내용 및 특징
1897년에 高宗의 俄館播遷을 반대하여, 당시 러시아영사관으로 피신해 있었던 高宗의 還宮을 요구하기 위해 전국의 儒生들이 儒疏에 참여하였으며, 영양 영양향교에서 高宗還宮의 필요성을 경상도 일대의 儒林에 널리 알리는 通告文이다. 본 通告文의 내용에 의하면, 乙未事變 등 日本公使館의 거듭된 만행에 두려움을 느낀 高宗이 부득이 러시아영사관으로 피신하였으나 그 기간이 1년 가까이 지속되자 국제사회에 있어 나라의 체신이 말이 아니므로 全國의 儒林이 連名하여 조정에 대해 임금의 還宮을 요구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乙未事變으로 인해 國母가 弑害되었으므로 臣子의 義理로 반드시 國母의 원수를 갚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국의 유림들이 상경하여 상소를 올리되 宣惠廳에 都廳을 두고, 세명의 疏首를 두었는데 그들은 趙性黃趙性薰蔡光黙등으로, 각기 初疏‧再疏‧三疏의 疏首를 맡았다. 또 慶尙道都廳을 책임지는 책임자로는 鄭會圭가, 儒疏의 운영경비를 맡아보는 掌財로는 李敏錫李範錫등이 임명되었다.
자료적가치
乙未事變을 추진하여 朝鮮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하려던 日本은 갑작스럽게 高宗이 러시아 영사관으로 피신하여 親日內閣을 해산하고 親露內閣을 출범시키자 크게 당황하였다. 이 시기에 高宗의 還宮을 바라는 백성들의 上疏가 빗발치듯이 나타났는데, 특히 慶尙道의 儒生들이 이러한 上疏運動의 中心에 섰다. 이처럼 전국의 유생들과 독립협회 등 국민들의 환궁요구가 거세게 일어나자, 본 문건은 이러한 당시의 시대정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문건이라고 하겠다. 마침내 1897년 2월 20일 高宗慶運宮으로 환궁하였고, 그 해 10월에는 大韓帝國의 황제로 즉위하는 조치를 단행하였다. 본 문건은 이러한 당시의 시대정세를 이해할 수 있는 주요 참고자료라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97년 영양향교(英陽鄕校) 통고(通告)
右通告事邦國靡靖
玉駕播越露館星霜一周凡爲臣子者偃息床第非彛性所可忍故八路章甫齊會
京師以先請
還御爲首義設疏會于宣惠廳丙申臘月二十四日進伏至今月十七日自承
溫批十九日
還御于慶運宮諭此蕘言無望
荃心之感回天祐
宗枋乾機斡旋於風雷之頃
鑾建載回霓望卽蘇泰運將舒及此良會益勵薪膽之志則
聖母之讐亦可復矣矧惟
因封隔在三朔讐賊尙戴一天鄙等所以沐血碎首王請天討交還漏綱之賊也瞻▣穹
蒼揮灑義淚今將進伏伏願僉君子奮然來赴沐浴齊請以謝
聖母陟降之靈以答
先王培養之恩千萬幸甚
右敬通于
英陽校中僉君子座下
此亦中屢月進伏
經費浩大故疏錢玆以分排錢
送覽通後五月內依數斯速辦
備別定有司以爲上送之地千萬千萬
初疏之首趙性黃
再疏之首趙性薰
三疏之首蔡光黙
丁酉正月二十九日發文李文和
金雲洛
慶尙都廳鄭會圭
掌財李敏錫
李範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