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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청하향교(淸河鄕校) 신창별소절목(新創別所節目)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XC.1882.4711-20110630.Y1110204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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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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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첩관통보류-절목
내용분류: 경제-세금-사목/절목
작성주체 이순각, 마기승, 청하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하로 233번길
작성시기 1882
형태사항 크기: 31 X 30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포항 청하향교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덕성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포항 청하향교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청하면 청하로 233번길 16-5

안내정보

1882년 청하향교에서 새롭게 만든 별소(別所)의 운영 규칙
이 문서는 별소의 운영규칙을 소개한 글과 운영규칙으로 구성되어 있다. 1881년 7월에 청하현감으로 취임한 마기승은 부서진 향교건물의 수리와 향교의 교육 기능과 제례의식을 통한 교화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하여 50전의 돈을 향교에 기부하였다. 이어서 고을의 나이 많은 유생 중에서 1인을 뽑아서 이를 관리토록 하였다. 그는 춘추향사에 모든 유생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학문을 점검하고, 매달 첫째 날의 삭망제와 봄, 가을의 제례시에 술과 음식을 먹는 예법를 통한 교화를 실천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운영규칙은 고리대를 통한 재산의 증식과 자금의 활용부분에 대하여 규정하고 있다. 즉, 원전 50전을 1년간 주변에 10냥에 5냥의 이자를 받으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후 10냥은 별소에 주고, 10냥은 유생들의 공부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는데 쓰라고 하였다. 또한 5년 후에는 향교 본래의 땅을 사서, 안정된 운영재원으로 오랫동안 지킬 수 있도록 계획을 짜라고 하였다. 더하여 향교 운영에 있어서 부족한 것들은 차후에 마련하도록 명하고 있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96
이병훈

상세정보

1882淸河縣監이 출자한 금전을 운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別所의 節目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1882년 봄에 청하현감馬箕昇이 50錢을 扶助한 후 이 돈을 관리․운영하기 위하여 鄕中 老儒 1인을 선발하여 향교의 講學 需用費와 기타 경비로 활용하도록 작성한 節目이다.
향교에서는 교육과 제례를 행하고, 건물을 유지하며, 유생과 교생의 활동을 위한 재정이 필요하였다. 조선 건국 이래 국가에서 향교에 學田과 奴婢를 군현의 등급에 따라 차등 지급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조선후기 향교에서는 국가에서 마련해 주는 토지와 노비 이외에도 여러 가지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향교의 별도 사유지인 校田이 대표적이었다. 이러한 校田은 유생이나 군현의 사족들이 儒錢을 각출하여 마련하거나, 향교재정을 운용하면서 남은 돈을 가지고 토지를 매입하여 증대시키는 경우, 기증이나 願納, 훼철된 서원, 사우의 전답을 향교에 소속시키는 방법을 통해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향교 재정을 보충하는 중요한 방법은 立本取植, 存本取利하는 殖利錢이었다. 조선후기에는 각급 관청 및 향교, 서원, 사마소, 양사재 등의 학교기관, 자치조직인 향약, 동약 등 군현의 거의 모든 기구에서 立本錢을 마련하고 이자를 받아 재정에 충당하는 殖利 활동을 널리 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식리는 입본전만 마련되면 관권이나 향촌에서의 권위와 세력을 바탕으로 손쉽게 재정을 보충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성행하였다. 향교도 예외는 아니어서 전국의 모든 향교가 殖利錢을 운용할 정도였다. 식리활동을 위해서는 立本錢을 마련하는 것이 최우선적인 일이었다. 향교에서 이를 마련하는 방법은 관에서 입본전을 획급해 주는 것과 향교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하는 경우가 있었다. 향교에서는 건물의 수리 비용 등을 경내의 儒戶에 각기 일정량의 금액을 할당하여 이를 거둔 후 각종 비용을 제외하고 남은 금액을 가지고 향교 근처 동네를 중심으로 取植을 하였다. 또한 관에서 마련해주는 경우는 관학에 관심이 많은 감사나 수령이 부임했을 때 향교의 재정을 돕기 위하여 녹봉이나 관의 재정을 획급하기도 하였다.
청하향교의 경우 수령인 마기승이 녹봉 50전을 떼어 立本토록 하고 이를 통해 15냥은 식리를 위해 사용하고, 10냥은 보관을 하였으며, 10냥은 講學에 필요한 비용으로 사용토록 하고 있다. 수령이 이처럼 입본전을 획급해 주는 경우는 右文之治, 供士之資, 興養之資, 春秋享祀補用 등과 같이 향교의 2대 기능인 교육과 제례를 위하여 사용토록 한 목적을 담고 있었다. 이는 守令七事의 하나인 ‘興學校’와 관련된 조처였지만 항례적인 것은 아니고 향교나 교육에 관심이 큰 지방관이 부임해 왔을 때 볼 수 있는 일이라 하겠다. 실제 마기승1885정선군수로 있을 시에 선정과 향교 교육을 부흥시킨 공이 있어서 해당 지역민들이 ‘不忘碑’를 세워 그의 치적을 기념하기도 하였다.
殖利를 하기 위하여 향교에서는 有司나 別有司를 별도로 두었고 최종적으로 校任이 담당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식리전의 분급은 郡縣전체의 각 面里에 고루 나누어 주는 경우도 있었고, 몇 개의 면리만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였다. 대개 관에서 획급해준 식리전은 관권을 배경으로 전체 면리를 대상으로 한 것에 비해 향교 자체의 식리전은 입본전도 적은 관계로 향교근처의 몇 개 面里에 국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또한 관의 비호를 받으며 양반유생들의 신분적 우위를 바탕으로 향교는 식리전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향교에서는 이러한 식리전을 바탕으로 田畓을 매입하여 항구적인 경제기반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실제 본 절목에서도 5년이 지난 후 땅을 매입하여 영구히 보존토록 하는 계획을 세우라고 하고 있었다.
마기승1881년 7월에 청하현감으로 취임한 후 이처럼 돈을 획급한 것은 쇠퇴한 학문의 쇄신과 鄕風을 진작시키고, 부족한 향교재정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부임한 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청하향교의 秋享祭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심각하게 훼손된 大成殿과 廟宇 주변 담장을 보고 그것을 수리하기 위하여 고을의 재물 현황을 점검하였으나, 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수리를 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실제 청하향교1398년 처음 창건된 이래 1716년에 현재의 위치로 移建하였으며, 이후 1843년과 1923년에 수령과 향중 사족들의 扶助로 보수가 있었다. 건물을 수리하는 데는 수백전의 자금이 들어가는 큰 공사였기 때문에 관의 적극적인 협조 외에도 향중 사족들의 협조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마기승 재임 하던 19세기 말에는 향교에 대한 사족들의 관심부족과 관청의 재력이 부족하여 건물이 훼손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1882년 正月의 望祭를 거행할 시에 禮와 절차는 儀文에 따라 매우 극진히 하는 것에 감탄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유생들의 낮은 학문적 수준과 향교의 운영자금이 없음에도 유생들의 성의가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이후 大學工夫 성취함에 있어서 財貨의 조화됨이 더욱 좋다고 하며 스스로 녹봉 50錢을 특별히 출자하였다. 이어서 고을의 老儒 중에서 1인을 뽑아서 이를 관리토록 하였다. 이를 통해 춘추향사에 모든 유생들이 모여 글을 지으며 학문을 점검하고, 매달 첫째날과 節氣에 따라서 향음주례를 통한 풍화의 교를 실천하는데 작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후 李淳覺을 有司로 정하여 이를 관리하도록 조처한 후 元錢 50錢을 1년간 주변에 10냥에 半条씩을 殖利하여 10냥은 本所에 주고 10냥은 講學에 필요한 물건을 구하는데 쓰라고 하였다. 또한 5년 후에는 본래의 땅을 매입하여 영구히 지킬 수 있도록 계획을 짜라고 하였다. 더하여 향교 운영에 있어서 부족한 것들은 차후에 마련하도록 명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이 자료는 조선후기 향교의 재정운영 실태를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19세기말 사족들의 향교 운영 기피양상과 지방관의 학교 진흥책 등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영남대출판부, 1979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 Ⅰ, 嶺南大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 출판부, 1992.
八道總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이병훈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82년 청하향교(淸河鄕校) 신창별소절목(新創別所節目)
新刱別所節目
新刱別所節目序
爲永遵事嶠南素稱鄒魯之
鄕故當欲願見猥蒙天恩承
乏莅玆壤地雖曰褊僻俗風猶
有古朴可觀者一二存焉越三月
謁夫子廟退坐講堂宮墻盡
廢殿宇叶規揆諸邑樣宲
逾所聞心常健羨之愛慕之
粵明年之正朔因望謁而行大
禮於倫堂之庭老少咸集儀文
盡備其揖讓之節折旋之規
彬彬焉濟濟焉若磨礱成就
他日期待何患不足而所惜者
但少文多質也嗚呼吾夫子
不云乎禮與其奢也寧儉今
日少文多質寧不逾於文多
質少耶於是與諸生合席於
堂上略行酒合辭而言曰愚聞
古語曰禮生於有廢於無生等
生於偏方幸霑東漸之化南撫
之澤又因先輩之敎導粗習
儀文然所歎者無物不誠也余
右之曰古人圭窬蓽戶有席
上之珍者簞瓢屢空有天下
歸仁者若履於行潛於滋粹
乎面盎乎背浹洽於心何患物
之有無然大學工夫成於貨財
羲易時義備於雲天此亦不可
無者余雖薄廩特出五十錢
以助之擇其鄕中老儒一人勤
幹者以爲看撿焉此難免於穰
田者笑幸有導於指南之道春
秋嘉會少長咸集倣蘭亭
之勝事月吉良辰飮食饌法
藍田之舊約則其於風化
有小補焉
壬午季春
本倅馬箕昇
有司李淳覺
一元錢伍拾兩一年四邊利爲式
拾兩則半条拾兩付于本所拾
兩則爲講學需用之資是齊
一過五年後援本買土以爲永
久遵守之計是齊
一未盡條件待後磨鍊是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