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2년 청도향교(淸道鄕校) 통유(通諭)
1842년 청도향교에서 향교건물의 중수(重修)를 위해 유림의 공론을 모으려고 작성한 통유(通諭)이다. 본 통유의 내용에 의하면, 청도향교의 중수(重修)에 대한 논의는 이 해 봄부터 시작되었으나 관청에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계속 공론을 모으라는 제음(題音)을 내리기만 해서 9月이 될 때까지 향교중수에 대한 최종적 결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대해 통유에서는 심지어 성주(星州)고을의 선비들이 3차례나 과거를 치를 수 없었던 사정과 이와는 반대로 밀양(密陽)의 경우, 과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선비들이 많이 나타났었다는 사례를 例로 들면서 이는 모두 향교건물터의 운세에 따라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청도군 온 고을의 선비들과 문중이 모두 동참하여 유회(儒會)를 열고, 반드시 향교중수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공론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 통유를 통해서 우리는 1842년 청도향교중건의 추진과정과 연관된 여러 가지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