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842년 청도향교(淸道鄕校) 상서(上書)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XB.1842.4782-20110630.Y1110604102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소차계장류-소지류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법제-소송/판결/공증-소지류
작성주체 청도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 청도향교
작성시기 1842
형태사항 크기: 25 X 3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 청도향교 문중소개
현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 청도향교

안내정보

1842년 청도향교(淸道鄕校) 상서(上書)
1842청도향교에서 향교건물의 중수(重修)를 청원하기 위하여 작성한 상서(上書)이다. 본 상서의 내용에 의하면, 청도향교1734년에 화양읍 교촌동으로 옮겨진 뒤, 1842년에 이르기까지 근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갔으므로 향교내의 여러 건물들이 낡고 퇴락하여 붕괴가 염려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때문에 청도향교의 유생들이 1842년 2월 19일과 2월 20일의 두 차례에 걸쳐 청도군수에게 품목(稟目)을 올려 향교의 중수를 요청하였다. 청도군수는 이 사안에 대해 이건(移建) 문제는 추후에 논의하자는 것, 유림 전체의 공론을 모아줄 것 등의 내용이 담긴 제음(題音)을 내려 보낸다. 이러한 결정에 실망하지 않고 유생 최윤호 등은 청도향교의 중수를 청원하는 내용의 상서(上書)를 작성하여 동 20일에 경상감영에 올린다. 경상도관찰사는 향교중수의 사안을 당장 허락하지는 않고 향교건물의 손상정도를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내용의 제음을 내려 보낸다. 이는 당시 경상도관찰사였던 홍재철이 2월 15일자로 이조참판에 임명되었기 때문에 향교중수라는 큰일을 처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자료는 청도향교의 중수과정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사료에 해당한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

상세정보

1842청도향교에서 향교건물의 重修를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上書
내용 및 특징
1842淸道鄕校에서 향교건물의 重修를 청원하기 위하여 작성한 上書이다. 1734년에 移建된 청도향교1842년에 이르러 근 백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면서 전체 건물들이 낡고 퇴락하게 되어 시급히 보수하지 않으면 붕괴가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崔潤祜 등의 유생들이 1842년 2월 19일과 2월 20일에 걸쳐 두 번이나 鄕中稟目을 작성하여 淸道郡에 상신하였으나 淸道郡守는 2월 19일의 鄕中稟目에 대해 移建논의는 후일로 미루자는 題音을 내린다. 또 2월 20일에 다시 올린 향중품목에 대해서도 많은 선비들의 公論을 모아 다시 의견을 제기하라는 題音을 내린다. 淸道郡의 유생들은 이러한 의외의 題音에 대해 결코 실망하지 않고 다시 2월 20일에 바로 鄕校重修를 요청하는 上書를 작성하여 慶尙監營에 올린다.
본 上書의 내용에 의하면, 향교는 많은 선비들의 자긍심을 심어주는 곳이고, 聖人을 숭상하는 중요한 곳인데 이제 본 郡의 향교건물이 낡고 퇴락하여 붕괴의 염려마저 생겼으므로 부득이 유생들이 淸道郡守에게 重修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올렸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稟目에 대하여 淸道郡守가 많은 선비들의 公議를 모아서 다시 건의하라는 題音을 내렸으므로 이에 선비들의 公論을 모아 慶尙監營에 향교중수를 청원하는 上書를 올린다고 하였다. 上書를 올리는 대표자격으로는 崔潤祜芮德龜朴漢圭 등의 원로 유생들이 나섰고, 상서 하단의 서명인 란에는 芮大烈金再鳳朴時中 등이 서명을 하였다. 이러한 上書를 접수하게 된 慶尙道觀察使는 鄕校重修의 사안을 곧바로 허가하지 않고 향교의 실제사정을 상세히 조사해 보고하라는 題音을 내렸다.
자료적가치
慶尙道觀察使守令과 마찬가지로 한 道의 교육을 발전시킬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淸道鄕校의 유생들은 1차적으로 淸道郡守에게 향교건물의 重修를 청원하였지만 허락이 나지 않자 곧바로 慶尙道觀察使에게 다시 청원서를 올린 것이다. 그런데 이즈음 慶尙道觀察使였던 洪在喆은 2월 15일자로 吏曹參判에 임명되어 기존의 업무를 정리해야 할 상황이었고, 신임 慶尙道觀察使였던 李景在는 4월 12일에야 부임했으므로 전임 慶尙道觀察使가 된 洪在喆은 이 사안을 구체적으로 처리하기가 곤란하였으므로 후임자에게 미룬 것이다. 이러한 저간의 사정으로 淸道鄕校의 유생들은 그 해 10월초까지 몇 차례 더 건의서를 계속 상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자료는 淸道鄕校의 重修에 얽힌 과정들을 상세히 고찰할 수 있는 자료 중의 하나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2년 청도향교(淸道鄕校) 상서(上書)
淸道幼學崔潤祜芮德龜朴漢圭等謹齋沐再拜上書于
巡相國閤下㐲以國有學鄕有校寔是聖世崇奉之道而多
士矜式之所也本郡校宇經歲己久頹圯之患迫在朝夕抑豈
非多士慨欝之歎哉勢將重建後乃巳鄕論峻發方經設役奉
禀於本官則題音內都在多士之公議教是故玆敢齊聲仰
龥㐲願特念聖廟之頹圯且副多士之腆誠以竣大事之
地謹冒昧以陳壬寅二月二十日進士芮大烈幼學金再鳳朴時
等題第爲査實論報事本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