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慶尙北道蔚珍郡平海邑巨逸1里 일대에서 결성되었던 어촌 공동체 조직의 구성원 명부로 1909년부터 1984년까지의 座上, 洞首, 有司 역임자와 閒民을 기재
洞案
[내용 및 특징]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촌락 단위의 공동체 조직이 발달하였다. 相扶相助와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각종 契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농촌에서는 공동노동을 위한 두레 조직이 만들어졌다. 전통적인 어촌 촌락인 慶尙北道蔚珍郡平海邑巨逸1里 洞中에서도 공동노동과 분배 및 어장관리를 위해 결성된 공동체 조직이 확인되는데, 19세기 중엽부터 그 활동이 확인된다. 한편, 이곳은 조선후기까지 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의 狗巖洞에 속한 지역으로, 현재 거일1리 동중에는 공동체 조직과 관련된 각종 고문서류와 필사원본류가 전해진다. 본 자료는 그중 1909년부터 1984년까지의 座上, 洞首, 有司 역임자와 閒民을 기재한 洞案이다.
본 동안은 거일1리 동중에 전해지는 동안 중 가장 후기에 작성된 것으로 확인되며, 이를 통해 20세기 초반부터 후반까지의 동중 구성원의 성격과 주도 세력을 살펴 볼 수가 있다. 동안의 구성은 洞案序, 己亥年新洞案法, 洞改政案, 座目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본 자료가 成冊 될 당시에는 洞案序와 座目만 엮여져 있었으며, 후기에 좌목이 追錄되는 상황에서 己亥年新洞案法과 洞改政案을 중간에 추가하여 엮은 듯하다.
洞案序는 隆熙 3年(1909) 7월에 金景斗가 작성한 서문이다. 좌목에는 김경두가 동수와 좌상을 차례대로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서문에는 동안을 작성한 이유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먼저 서문에서는 洞에 案이 있는 것은 鄕에 序가 있고, 州에 學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序와 學은 모두 三代 시절의 교육기관으로 『周禮』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鄕約과 같이 향촌 교화 기구를 운영하고 결성할 때 시행 명분으로 많이 인용된다. 그리고 三代의 교화 기구와 더불어 藍田의 呂氏鄕約을 참작하여 하나의 稧를 결성하게 되었으니, 이를 바탕으로 相扶相助하는 전통을 이어 왔다고 한다. 그런데 원래 稧의 주도세력은 거일1리 토착세력이었다. 서문에 따르면 외지 출신의 인사는 閒民으로 계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말엽부터 貴賤의 구별이 없어지고 외래 문물이 밀려들어오는 등 세상이 변하여 새롭게 동안을 작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閒民까지 입록하는 新案을 만들게 되었다며, 생업에 충실히 하고 동안의 전통을 잘 계승하길 당부하며 서문을 마치고 있다.
동안의 작성 목적과 더불어 서문에서 주목할 점은 거일1리 동중에서 실시되던 계가 상부상조와 공동노동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적인 공동체 조직이나, 여씨향약을 명분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공동체 조직과 향약과의 접목은 16세기 중엽이후 확산되는데, 일찍이 士族들이 성장한 고을이나 동리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나타난다. 반면에 거일1리와 같이 전통적인 사족가문이 배출되지 못한 어촌 촌락의 경우 비교적 늦은 시기에 향약과의 접목이 이루어졌다.
서문 다음에는 1959년에 제정된 己亥年新洞案法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6개조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古來의 洞案法이 문란함으로 新法으로 개정함. 一, 지금부터 本里 임원을 다시 뽑을 때에는 尊位를 역임했던 인물 가운데 선택함. 一, 만약 洞首 이하의 유사가 異議를 제기할 때에는 前望을 상관하지 않음. 一, 無任인 자가 異議制案 할 경우에는 이후 洞任으로 望하지 않음. 一, 행동이 불순한 자에 한해 앞으로 望하지 않음. 一, 辛丑年(1957) 11월부터 長子가 分家하여 1戶主 1人이 되면 藿岩 2개를 취득치 못하는 것으로 정함. 이상 己亥年新洞案法의 내용 대부분은 임원 선출과 관련된 부분이다. 해방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인구 이동과 더불어 임원 선출에 있어서도 새로운 규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특히 인구유출과 관련하여 마지막 여섯 번째 조항이 주목된다. 이것은 藿巖의 취득 조건, 즉 미역 채취권에 대한 규제이다. 1950년대 이후 거일1리에서 유출되는 인구가 많아지자 長子가 分家한 집에 대한 미역 채취권을 제한하였다. 그 권한을 분가하지 않은 漁家에 넘겨 수입을 보존해줌으로써 추가 유출을 막고자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이어 기재되어 있는 洞改政案은 1982년에 마련된 것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洞任方은 初任有司로부터 임기 완료하며, 洞首와 尊位는 순서에 따라 임명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洞中公事에 불성실한 일이 인정됨으로 앞서 선출되는 순서 없이 洞中公事에 성실성을 우선적으로 하여 동수와 존위로 추대하기로 결정하여 시행한다. 유사, 동수, 존위 三方 任方에 있어 임기중 産中 또는 喪이 있어 洞祭香에 제관으로 行事를 못할 때에는 任方에서 자격을 상실한다. 洞改政案 역시 任方 즉, 임원의 임명이 주된 내용이다. 종전에 임원을 선출할 경우 존위는 동수와 유사 역임자, 동수는 유사 역임자로 뽑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개정안은 이러한 경력을 무시하고 성실성으로 보고 뽑는다고 나타나 있다. 이러한 규정의 변화는 토착세력의 기득권을 유지시켜 주기보다는 함께 공동체 조직을 이끌며 성실하게 생업을 수행하는 인물을 任方으로 선출하려는 의도로 여겨지는데, 산업화에 따른 인구 유출과 어촌 가구의 감소와 맞물려 제정된 듯하다.
마지막에는 좌목이 기재되어 있다. 동임별로 尊位, 洞首, 有司를 구별하였고, 閒民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존위 가운데는 그중 으뜸이었던 座上이 있으며, 前啣洞首와 前有司를 時洞首, 時有司와 함께 수록하였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洞任은 존위, 동수, 유사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중 존위는 촌락의 원로로 어업과 관련된 의사 결정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각종 제례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동수는 존위와 더불어 촌락의 대소사와 관련된 의사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자리였으며, 유사는 각종 실무를 맡고 있었다. 본 좌목은 동임별로 기재되어 있어 1909년 이후 한민에서 출발하여 유사와 동수를 역임하고 존위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네 차례에 걸쳐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다. 어느 시기 표시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데, 사망하거나 이주하여 洞中에서 일탈한 인물은 ‘仙’ 또는 ‘移居’라고 명기되어 있는 印章을 찍어 놓았다.
좌목에는 1909년부터 1984년까지 모두 351명이 기재되어 있다. 이 중 중복 인물을 제하면 모두 199명이다. 성씨별로는 朴氏 55명, 金氏 39명, 李氏 21명, 崔氏 18명, 鄭氏 11명, 尹氏 9명, 黃氏 7명, 全氏 6명, 權氏 5명이며, 그 외 方,白,孫,沈,安,嚴,吳,兪,林,趙,曺,韓,許氏가 확인된다. 박씨, 김씨, 이씨, 최씨의 비중이 비교적 높게 나타난다. 거일1리가 전통적인 班村이 아니어서 入鄕과 관련된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구전으로 이씨, 김씨, 박씨가 시간을 달리하여 입향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현재 거일1리 거주민들 가운데는 密陽朴氏, 金海金氏, 慶州李氏, 慶州崔氏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洞中 운영을 주도했던 가문을 추측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20세기 이후 전통적인 어촌 공동체 조직의 운영상 변화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상부상조와 공동노동, 그리고 구성원들 간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각종 契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거일1리와 같은 어촌에서도 공동노동과 분배 및 어장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조직은 19세기 후반 신분제의 폐지에 따른 사회상의 변화, 20세기 중반 이후 급속도로 진행된 산업화 등으로 운영상의 큰 변화가 나타났다. 이와 관련하여 閒民을 입록시킨 新案의 작성, 산업화 이후 인구 유출 현상과 맞물려 藿岩 채취권의 제한 및 동임 선출 조건의 완화 등이 확인되고 있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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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민속학』10, 金宅圭, 비교민속학회, 1993
『東海岸漁村民俗誌』, 金宅圭, 영남대학교출판부,2000
『蔚珍郡誌』, 蔚珍郡誌編纂委員會, 蔚珍郡, 2001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