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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창녕군(昌寧郡) 향약계안(鄕約稧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WZ.1902.4874-20110630.Y11420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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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지역 경상남도 창녕군
작성시기 1902
형태사항 크기: 33.5 X 25.5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46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1902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창녕군(昌寧郡) 향약계안(鄕約稧案)
1902경상남도(慶尙南道)창녕군(昌寧郡)에서 결성된 향약계(鄕約稧)의 계원 명부이다. 조선중기 이후 각 고을마다 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던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향약(鄕約)을 결성하고 운영해 나갔는데, 창녕군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왜적에 대항했던 양반들이 주축이 되어 향약이 결성되었으며 참여자의 명부를 향안(鄕案)이라 하였다. 하지만 창녕에서의 향안은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참여자의 자격을 둘러싼 갈등이 야기되면서 1823년부터는 작성되지 않았다. 이에 임진왜란 당시 참여했던 창녕지역 인사들의 후손들이 선조들의 구국 정신을 본받고 상호 간의 결속력을 강화한다는 의미에서, 종전의 향안을 계승하는 향약계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본 자료는 향약계의 결성 의의를 설명해 놓은 군수(郡守)박재화(朴在華)의 서문(序文), 향약계 운영 규정인 9개조의 절목(節目), 그리고 군수박재화 등 202명의 향약계 계원 이름을 수록한 계안(稧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광우

상세정보

1902慶尙南道昌寧君에서 작성된 鄕約稧案으로 향약계의 계원 명단과 운영 규칙인 9개조의 節目을 수록
鄕約稧案
鄕約稧序, 節目, 稧案
[내용 및 특징]
鄕約稧案은 昌寧鄕案의 전통을 계승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창녕에서는 1600년부터 1823년까지의 향원 명부를 기록한 향안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향안에 기록된 자는 해당 고을의 留鄕所와 鄕廳 운영에 관여하였다. 유향소와 향청은 조선시대 監司, 守令으로 이어지는 관치행정 기구에 대항하여 조직된 일종의 지방자치 기구로 지역별, 시기별 차이가 있지만 대략 17세기를 전후하여 재지사족에 의해 장악되었었다. 창녕에서는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처음 향안 입록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를 주도한 세력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 경력이 있었던 의병장 출신 사족들이다. 이들은 창의 경력을 바탕으로 전란 후 향촌 복구를 주도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향안 작성을 통해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것이다.
초창기 향안은 엄격한 향안 입록 규정을 제정하여 吏族이나 富戶와 같은 신흥사족들의 참여를 제안하는 등 폐쇄적으로 운영되었지만 17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향안의 권위가 약화되고 운영상의 파행이 나타나게 되었다. 먼저 1654년 시행된 營將事目은 座首에게 영장을 보좌하는 임무가 부여됨으로써 사족의 鄕任 기피 현상이 발생하였다. 또한 중앙 권력의 閥閱化에 따라 지방 사족의 관로 진출이 어려워지자 사족들은 향촌 내 지위 유지에 주력하였고, 이 가운데 사족들 간의 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다. 여기다가 사회, 경제적 변화에 따라 새롭게 사족으로 성장한 新鄕 세력이 향권 도전의 일환으로 향안 입록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舊鄕, 즉 전통 사족과의 갈등이 나타났다. 이상의 複雜多岐한 현상이 향안 권위의 약화와 향안 입록의 파행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창녕에서도 1823년을 마지막으로 향안 작성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한 가운데 1902년 수령이었던 朴在華와 기존 향안 입록자의 후손이 중심이 되어 창녕향안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한 향약계안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당시 향약계안의 작성은 초창기 재지사족의 향촌 내 지배질서 강화의 목적과는 차이가 있다. 한말 향청이 폐지됨으로써 실질적으로 향안의 행정적인 의미는 상실하였으나, 향안 입록자 후손들 간의 결속력을 다지고 지역 내에서 각기 가문의 우월성을 입증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했던 것이다. 향약계안은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먼저 향약계 결성을 주도했던 창녕군수박재화의 序文, 향약계 운영 규칙을 제정해 놓은 9개조의 節目, 그리고 향약계 계원 명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문에는 향약계 결성의 목적과 의의가 언급되어 있다. 먼저 稧의 의의는 會輔함으로써 同志 간에 勸講하고 대를 이어가며 誼를 닦아 후대의 사람들을 警戒하는데 있으나, 지금은 세속이 타락하여 모여서 술 마시며 시를 읊는 일을 고상한 취미로 알고 談笑하는 것으로 선비의 風致로 하게 되어, 稧의 道가 없어짐으로 나는 이런 일들을 잘못이라 생각하고 지금이라도 옛 정신을 挽回하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던 중 辛丑年(1901) 겨울 군수로서의 공무를 마친 여가에 火旺山倡義錄을 보니 임진왜란 때 자신의 선조 悌友公이 이 邑의 수령으로 재임하면서 忘憂堂 郭先生火山에 孤城하였는데, 이때 참여한 이 고을의 여러 인사들의 이름이 火旺山倡義錄에 열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에 지금 그 후손들이 창의했던 선조들의 정신을 쫒아 藍田呂氏의 향약정신을 바탕으로 立約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修稧함으로써 이 案을 보면 임난 당시 선조들의 구국충절과 喊聲血痕이 점철된 창의록을 오늘에 보는 느낌이 생기게 될 것을 바란다며 서문을 마치고 있다.
서문에서 주목할 점은 향약계의 구성원이 화왕산창의록 수록 인물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창녕향안은 임진왜란 당시 창의 경력을 보유한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특히 화왕산성에서의 孤城 참여 여부가 큰 기준이 되었다. 丁酉再亂으로 다시 창녕이 왜군에게 점령되자 郭再祐昌寧, 玄風, 密陽, 靈山 등 인근 고을의 인사들을 거느리고 화왕산성에 들어가 그곳을 지켰는데, 그때 참여했던 인사들 이름이 『火旺山城同苦錄』에 열거되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박재화가 언급한 화왕산창의록은 바로 『火旺山城同苦錄』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서문을 작성한 박재화는 당시 창녕의 수령을 역임했던 朴慶傳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와 창녕과의 인연을 매개로 향약계 결성에 참여 할 수 있었다. 또한 창녕의 사족들도 박재화를 향약계에 참여시킴으로써 향약계 결성에 있어 관권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여지를 마련했던 것이다.
서문 다음에는 9개조의 향약계 절목이 나열되어 있는데,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一. 이 계는 선조의 誼를 익히고 후세들에게 경계함을 계승하고자 함이니 각자 권면하는 것을 영원토록 도모한다. 一. 계는 향약으로 명칭하였으니 조례는 남전여씨 향약의 舊規를 따른다. 一. 계원 중 중견이 되고 유력한 자, 두셋을 有司로 두어 錢穀을 맡게 한다. 一. 계의 전곡을 내는 날짜를 어기면 계중에서 聲討한다. 一. 전곡을 유사에게 전담시켰으니 관리가 소홀함이 있을 때는 유사가 책임지고 納入케 한다. 一. 계원 중 吉凶事에 부조나 賻儀하는 것은 3년 후 전곡이 조금 불어날 때 그 방법을 정한다. 一. 계원은 각지에 산재에 있더라도 喪葬 때에는 弔喪하고 問慰하여 다른 친지와 달리한다. 一. 매년 契會는 2월 15일로 정한다. 一. 이후는 추가 入稧를 불허한다.
기본적으로 성리학적 생활행동 규범이 반영된 藍田呂氏鄕約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길흉사 때의 상부상조 규정은 실질적인 향약계의 기본 운영 방향이다. 추가 入稧의 불허는 계원 상호 간의 결속력 강화, 즉 창녕향안 입록자 후손들 간의 배타적 운영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절목 다음의 稧案에는 군수박재화를 비롯하여 모두 202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淸道 출신의 군수 박재화를 제외한 201명의 기재 인물 姓貫은 모두 14개가 확인되며, 昌寧成氏 59명, 光州盧氏 32명, 瑞興金氏 22명, 晉州河氏 20명, 密陽楊氏 15명, 長淵盧氏 13명, 昌寧曺氏 8명, 碧珍李氏 7명, 光州李氏 7명, 坡平尹氏 5명, 晉州姜氏 4명, 夏山長氏 4명, 密陽孫氏 4명, 文化柳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중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성관은 단연 창녕성씨와 광주노씨이다. 1600년에서 1823년까지 작성된 창녕향안 입록자는 모두 786명인데 여기서도 창녕성씨와 광주노씨의 비중이 높다. 향안에서의 두 성씨는 모두 392명으로 전체 입록자 중 49.9%를 차지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그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향약계안에서도 두 성씨는 총 91명이 나타나 전체 비율의 45.3%로 거의 절반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중기 이후 향안을 매개로 한 창녕의 鄕權이 창녕성씨와 광주노씨 두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자료적 가치]
韓末 昌寧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후 지역 사족들은 鄕案을 매개로 향권에 관여해 왔다. 하지만 17세기 중반 이후 향임의 권위약화와 複雜多岐하게 나타난 사족들 간의 갈등으로 인해 향안 작성의 파행이 증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창녕에서도 1823년을 마지막으로 향안 작성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1902년 결성된 향약계는 조선중기 이래 유지되어 왔던 창녕향안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조직되었다. 향청의 폐지로 향안의 행정적인 의미는 상실하였으나, 과거 선조들의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 향안을 복구한다는 의미에서 향약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즉 과거 창녕향안에 입록되었던 선조들의 지역 내 위치를 계승받아, 신분제 폐지로 지역 내에서 약화되어 가고 있던 전통적 사족 가문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자료이다.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第1回 韓國學 國制學術會議 論文集』, 가와시마 후지야,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79
『昌寧郡誌』, 昌寧郡誌 編纂委員會, 昌寧郡誌 編纂委員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2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창녕군(昌寧郡) 향약계안(鄕約稧案)
鄕約稧案
鄕約稧序
稧之設古矣其古也以會輔切
偲爲同志之勸講世修誼爲後承
之戒矣降以今也以觴咏爲高趣
談笑爲風致而稧之道蔑焉不
侫惟是之病而思欲回今而挽古
者久矣辛丑冬不侫有昌山
命公退之暇得火山倡義錄而
觀之則昔在染夷之亂吾先祖
悌友公適宰是邑與忘憂堂
郭先生守孤城於火山而時之境
內諸君子從以唱之因列名於同
錄以貽後人盖有不待修而自成
一稧者矣遂訪諸邑中今日之邑
中諸章甫盡是當時義錄中
雲仍則觀於此而得無興慨之
心乎噫吾輩之講先修誼自不得
不以事而至於會輔切偲之方固
在今日立約之如何耳稧之修不
于此之宜乎且之人士皆有退
讓古人之風非公事未甞至於郡
室而自余之來樂余從而不余遐
者盖爲其爲賢祖之孫而不以今
日之勞拙而棄之也間甞觴咏於
竹亭而無一人浪謔之失談笑於蒲
齋而有胥相勸勉之戒則不侫之平
日所病焉而欲挽回之者不費一半
而擧悉於此矣遂請與諸君子
修稧事稧旣成因列名於同案
俾後之覽此案者更有倡義錄
今日之感則此稧之設豈止爲此日
之樂事而已也猥搆數語於卷弁
聊與諸君子供一笑云耳
壬寅流月之望密城后
朴在華
節目
一此稧之設一則講先誼也一則戒後
承也凡我同案之人各相勸勉俾
有永圖事
一稧旣以鄕約爲名則稧中條例一
從藍田舊規事
一擇稧中勤幹有風力者二三人爲
有司以掌錢穀事
一稧錢稧穀如有愆期自稧中齊
聲徃討事
一錢穀旣是專擔於有司則其於
取植之地如有虛踈干涉以致愆
者責納於有司事
一稧員中吉凶助賻待三年後錢財
稍長更定節目事
一稧員雖散在各鄕喪葬慰唁不
可與他親知同視事
一每年稧會日字以二月十五日爲
定事
一自今修案後切勿更許追入

稧案
郡守朴在華己未
國元
】密陽人居淸道
李萬會戊申
明五
】廣州人
成述鎬戊申
賛玉
】昌寧人
盧秀永己酉
仁可
】光州人
河師秉己酉
天若
】晋州人
成昞鎬己酉
閏擧
】昌寧人
金寬東己酉
仲寬
】瑞興人
盧希圭己酉
九兼
】長淵人
李湜會庚戌
壬淑
】廣州人
成載植庚戌
君幹
】昌寧人
成禎鎬辛亥
晦之
】昌寧人
河泰軫辛亥
敬斗
】晋州人
姜萬熙辛亥
致億
】晋州人
盧基燮辛亥
致汝
】光州人
盧啓洪辛亥
敬三
】長淵人
河鎭秉壬子
聖文
】晋州人
成璨永壬子
武玉
】昌寧人
金胤東壬子
永祚
】瑞興人
楊慶奎壬子
克元
】密陽人
金國東癸丑
君彦
】瑞興人
金奎銖癸丑
乃允
】瑞興人
成能鎬癸丑
乃克
】昌寧人
李炳宇癸丑
司洪
】碧珍人
成潤鎬甲寅
道一
】昌寧人
盧湊暉甲寅
季浩
】光州人
成弼鎬甲寅
敬三
】昌寧人
盧基興甲寅
致德
】光州人
成載福甲寅
希遠
】昌寧人
河大圖甲寅
順七
】晋州人
楊鍾律甲寅
聲遠
】密陽人
成世鎬乙卯
武克
】昌寧人
盧秀祿乙卯
敬如
】光州人
李赫會乙卯
敬哉
】廣州人
盧秀勲乙卯
士俊
】光州人
盧基應乙卯
致五
】光州人
成瑾鎬乙卯
致岡
】昌寧人
盧祐容乙卯
祥天
】光州人
金冕東乙卯
伊佐
】瑞興人
成琪鎬丙辰
命元
】昌寧人
盧瑞容丙辰
子鑑
】光州人
成萬鎬丙辰
致三
】昌寧人
成璋鎬丙辰
乃文
】昌寧人
金奎昞丙辰
敬友
】瑞興人
河柱秉丙辰
乃順
】晋州人
盧湊璞丙辰
季珍
】光州人
盧宇容丙辰
致祥
】光州人
楊鍾厦丙辰
子玉
】密陽人
成譽永丙辰
敬武
】昌寧人
楊甲奎丙辰
應三
】密陽人
成大準丙辰
善佐
】昌寧人
成大鴻丁巳
聖沿
】昌寧人
姜象熙丁巳
緯若
】晋州人
李秉茂丁巳
元悅
】廣州人
張斗鍾丁巳
元五
】夏山人
金煥東丁巳
周見
】瑞興人
姜準熙丁巳
致允
】晋州人
盧翔洪丁巳
尙儀
】長淵人
成英鎬丁巳
乃岡
】昌寧人
盧秀德丁巳
以三
】光州人
成文鎬戊午
致奎
】昌寧人
河龜秉戊午
聖武
】晋州人
金奎億戊午
致億
】瑞興人
張大璿戊午
敬七
】夏山人
河五秉戊午
彛五
】晋州人
盧湊奇戊午
應律
】光州人
楊晋奎戊午
明應
】密陽人
楊鍾郁戊午
公彬
】密陽人
成大溍己未
聖咸
】昌寧人
盧在馨己未
伯薰
】光州人
成日鎬己未
明國
】昌寧人
楊粲奎己未
允和
】密陽人
成胤鎬己未
元可
】昌寧人
楊卓奎己未
克賢
】密陽人
李重翰己未
士元
】碧珍人
楊鍾皥己未
汝玉
】密陽人
盧秀憲己未
敏余
】光州人
金恊東己未
一叟
】瑞興人
盧奎容己未
文叟
】光州人
金燁東己未
國弼
】瑞興人
成珪永己未
錫汝
】昌寧人
曺錫璣己未
舜七
】昌寧人
張元昊己未
明善
】夏山人
金始東庚申
允中
】瑞興人
成福永庚申
錫五
】昌寧人
盧三洪庚申
台範
】長淵人
成載矩庚申
希瑞
】昌寧人
盧昌容庚申
大汝
】光州人
成樂勻庚申
文伯
】昌寧人
成敏鎬庚申
周元
】昌寧人
河麟秉庚申
南見
】晋州人
盧大欽庚申
敬五
】長淵人
金奎五庚申
丁瑞
】瑞興人
楊在奎庚申
和五
】密陽人
楊鍾禹庚申
伯夏
】密陽人
金以東庚申
聲振
】瑞興人
成大澈庚申
敬伯
】昌寧人
成大沅庚申
聖弼
】昌寧人
成祚永辛酉
汝胤
】昌寧人
河奎秉辛酉
五兼
】晋州人
盧基億辛酉
致仁
】光州人
金奎煉辛酉
昌旭
】瑞興人
成載燾辛酉
敬直
】昌寧人
金在基辛酉
舜衡
】瑞興人
孫郁秀辛酉
華見
】密陽人
尹騏孝辛酉
用見
】坡平人
盧在馥壬戌
仲薰
】光州人
張安昊壬戌
希仲
】夏山人
盧鶴容壬戌
天可
】光州人
成大濩壬戌
聖律
】昌寧人
盧秀麟壬戌
鳳如
】光州人
李斗晞壬戌
華現
】碧珍人
李斗玄壬戌
悳升
】碧珍人
成樂臣壬戌
文擧
】昌寧人
成學鎬壬戌
文允
】昌寧人
盧秀甲癸亥
元卿
】光州人
曺有祥癸亥
乃興
】昌寧人
李秉潤癸亥
應執
】廣州人
成大溶癸亥
乃善
】昌寧人
盧湊珉甲子
弘見
】光州人
盧麒容甲子
聖可
】光州人
李重燁甲子
士衡
】碧珍人
曺錫八甲子
道進
】昌寧人
河泰洪甲子
漢慶
】晋州人
成樂祖乙丑
文淑
】昌寧人
河淑秉乙丑
善五
】晋州人
成哲永乙丑
聖初
】昌寧人
尹永源乙丑
進汝
】坡平人
盧在穆乙丑
而悅
】光州人
楊鍾八乙丑
仲玉
】密陽人
李斗鼎乙丑
玉鉉
】碧珍人
金世東乙丑
震五
】瑞興人
成禧根乙丑
殷燁
】昌寧人
孫郁基乙丑
文甫
】密陽人
金奎玉丙寅
舜可
】瑞興人
成載麟丙寅
極瑞
】昌寧人
金建東丙寅
極中
】瑞興人
盧泰容丙寅
文瞻
】光州人
成載善丁卯
敬守
】昌寧人
河大圭丁卯
士立
】晋州人
李重憙丁卯
乃衡
】碧珍人
盧鳳洪丁卯
儀範
】長淵人
盧舜鍾丁卯
弼若
】光州人
河泰漴丁卯
源崙
】晋州人
河永秉丁卯
允兼
】晋州人
楊建奎丁卯
極五
】密陽人
成樂鎭戊辰
聖化
】昌寧人
成鍾睦戊辰
聖深
】昌寧人
河泰奭戊辰
周伯
】晋州人
盧馹容戊辰
駿可
】光州人
盧在馝戊辰
季薰
】光州人
金啓東戊辰
養賢
】瑞興人
盧秀冕戊辰
乃卿
】光州人
成璋永己巳
允明
】昌寧人
成瀚永己巳
原允
】昌寧人
成樂遠己巳
任夫
】昌寧人
成周永己巳
源淑
】昌寧人
孫景基己巳
仁仲
】密陽人
盧德欽己巳
國瑞
】長淵人
曺有琳己巳
敬仲
】昌寧人
成大璣庚午
道衡
】昌寧人
河洛秉庚午
文秀
】晋州人
孫道鉉庚午
敬熙
】密陽人
李基甞庚午
賢可
】廣州人
盧燉洪庚午
仁範
】長淵人
金桂東庚午
明八
】瑞興人
盧在洪庚午
敬範
】長淵人
盧德洪庚午
友三
】長淵人
成元永辛未
孔汝
】昌寧人
成桂泳辛未
明振
】昌寧人
成世永辛未
功禹
】昌寧人
楊琫圭辛未
賛五
】密陽人
成大泌辛未
允汝
】昌寧人
楊址煥辛未
應八
】密陽人
成樂原壬申
元吉
】昌寧人
成義永壬申
人路
】昌寧人
成度默壬申
京伯
】昌寧人
成熙永癸酉
學輯
】昌寧人
盧相偰癸酉
舜翊
】長淵人
河龍秉癸酉
在見
】晋州人
尹龍采癸酉
見五
】坡平人
盧秀憙甲戌
樂汝
】光州人
盧秀利甲戌
禮叔
】光州人
盧相郁乙亥
文哉
】長淵人
金熙琫乙亥
粲文
】瑞興人
金煥東乙亥
應三
】瑞興人
曺錫寅乙亥
敬之
】昌寧人
河壽秉乙亥
岡叟
】晋州人
尹翼孝乙亥
友顯
】坡平人
曺有弘丙子
伯遠
】昌寧人
姜億馨丙子
珍華
】晋州人
李迪會丁丑
允吉
】廣州人
盧相東丁丑
寅出
】長淵人
成敦永戊寅
禮仲
】昌寧人
曺錫璉戊寅
道範
】昌寧人
尹昌孝己卯
克見
】坡平人
河泰祿己卯
謙叟
】晋州人
曺錫二庚辰
道三
】昌寧人
成思永辛巳
樂汝
】昌寧人
成一慶辛巳
萬祚
】昌寧人
成璹鎬癸未
乃會
】昌寧人
河銖秉癸未
允伯
】晋州人
柳基永乙酉
景五
】文化人

光武六年壬寅[印]七月初八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