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狗巖洞에서 결성되었던 어촌 공동체 조직 구성원 16명의 명단으로, 狗巖洞이 分洞된 후 1900년 11월 19일에 새롭게 작성
庚子十一月十九日狗巖分洞洞案
[내용 및 특징]
조선후기 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의 狗巖洞은 지금의 慶尙北道蔚珍郡平海邑巨逸1里로 전통적인 어촌 촌락이다. 현재 거일1리 洞中에는 늦어도 19세기 중엽에 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공동체 조직의 각종 고문서류와 필사원본류가 전해지는데, 본 자료는 박곡리가 分洞되고 난 후 1900년 11월 19일에 작성된 洞案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相扶相助와 공동노동,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각종 契 조직이 결성되었었다. 구암동과 같은 어촌 촌락에서도 조선후기부터 공동노동과 분배 및 어장관리를 위해 조직된 공동체 조직이 확인되며, 이와 관련하여 본 조직의 구성원 명단과 임원 명단을 기록한 洞案이나 座目이 작성되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구암동은 1900년 무렵 어떠한 이유로 分洞되었다. 20세기 초반의 기록에 따르면 박곡리는 구암리와 거일리로 분동되어 있다. 본 동안은 어느 시기 박곡리에서 구암리가 분리 될 때, 새로운 동안의 마련 요구로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안은 ‘庚子十一月十九日狗巖分洞洞案’이란 제목으로 엮여져 있으며, 앞에는 完議가 수록되어 있다. 완의는 分洞 이후 上納 문제를 합의한 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合村 당시 上納 문제의 경우 彼此가 빈곤하여 큰 시비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큰 논란을 일으킬 필요 없이, 분동 이후 朴谷에서는 박곡의 동역만을 부담하고, 狗巖에서는 구암의 동역만을 부담하는 것으로 합의하고 완의를 하게 되었다고 나타나 있다.
완의 다음에는 新洞案이 수록되어 있다. 모두 16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분동 이후 새롭게 작성된 동안인 듯하다. 그런데 신동안의 수록 인물 가운데 거일1리 동중에 전해지고 있는 1899년의 구암동 ‘座目成冊’ 수록 인물 28명에 포함되어 있는 인물은 한 명도 확인되지 않는다. 당시 새롭게 동안에 입록된 인물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입록 인물의 성씨는 朴氏 6명, 崔氏,金氏 각 3명, 李氏 2명, 孫氏,宋氏 각 1명이다. 다른 동안에서처럼 박씨, 최씨, 김씨, 이씨의 비중이 높은데, 현재 거일1리에는 密陽朴氏, 金海金氏, 慶州李氏, 慶州崔氏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특히 박씨가 많은데 옛적 박씨 중 한 富豪老人의 인품이 고매하여 여러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이에 마을 이름을 朴谷이라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구암동이 박곡과 分洞되기 전부터 박씨가 이 일대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동안의 말미에는 朴谷頭民 鄭錫鼎과 鄭錫玄의 手決이 확인된다.
[자료적 가치]
구암동과 같은 어촌에서도 조선후기부터 공동노동과 분배 및 어장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 조직이 결성되었었다. 본 자료에는 어촌 촌락이 分洞되면서 각 동리별로 上納 문제를 해결하는 完議와 이때 새롭게 작성된 동안이 함께 수록되어 있어, 전통적인 어촌 공동체 조직의 운영 추이를 살펴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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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