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狗巖洞에서 결성되었던 어촌 공동체 조직의 1899년 座目으로 모두 28명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으며, 각 洞任別 성명도 함께 부기한 자료
己亥十一月日洞中座目成冊
[내용 및 특징]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相扶相助와 공동노동,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契 조직이 결성되어 왔다. 특히 어촌에서는 공동노동과 분배, 어장관리를 목표로 하는 공동체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지금의 慶尙北道蔚珍郡平海邑巨逸1里에서도 이러한 조직이 확인된다. 거일1리 동중에 보존되어 있는 각종 고문서류와 필사원본류를 살펴보았을 때, 이곳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늦어도 19세기 중엽에 결성된듯하다. 당시 이 지역은 狗巖洞이라 불렸다. 행정구역 개편이전 구암동은 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에 속해 있었다.
본 자료는 ‘己亥十一月洞中座目成冊’이란 제목으로 엮여져 있으며, 1899년 당시의 구암동 洞員의 성명을 기재해 놓았다.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는데, 앞부분은 洞員 명단이 기재되어 있으며, 뒷부분에는 이들을 洞任別로 분류해 놓았다. 먼저 좌목에 기입된 인원은 총 28명이다. 이 외에 4명의 이름은 종이로 가리어져 削名되어 있다. 削名된 흔적 위에는 ‘移居他鄕’, ‘仙’이라고 기입되어 있는데, ‘仙’ 또는 ‘移居’라고 기재되고도 削名되지 않은 인물도 있다. 시간을 달리한 후기의 어느 시점에 事故 유무를 기재한 것 같다. 이를 통해 좌목에 입록될 수 있는 자는 기본적으로 洞中 구성원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입록 인물의 성씨는 朴氏 10명, 金氏 5명, 崔氏 4명, 白氏,尹氏,鄭氏 각 2명, 全氏,李氏,姜氏 각 1명이다. 구암동이 전통적인 반촌이 아니어서 入鄕과 관련된 정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구전으로 이씨, 김씨, 박씨가 시간을 달리하여 입향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다. 현재 거일1리 거주민들 가운데는 密陽朴氏, 金海金氏, 慶州李氏, 慶州崔氏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구암동 시절 洞里를 주도하던 가문을 추측할 수 있는 정도이다.
좌목성책 뒷부분에는 洞員 가운데 洞任을 역임한 인물을 나열해 놓았다. 동임으로는 尊位, 洞首, 有司가 확인된다. 이 중 존위는 촌락의 원로로 어업과 관련된 의사 결정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각종 제례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동수는 존위와 더불어 촌락의 대소사와 관련된 의사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자리였으며, 유사는 각종 실무를 보는 자리로 존위, 동수, 유사 체제로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 본 자료에는 존위가 7명(削名 1명), 동수 10명(削名 1명), 유사 6명(削名 3명)이 나타난다. 이 중 존위 7명은 전원 동수를 역임했던 인물이며, 동수 중 유사 역임자는 1명뿐이다. 연배로 보아 동수 역임 후에는 존위 위치로 바로 올라 갈 수 있는데 반해, 유사의 자리는 비교적 젊은 층에서 맡았으며 어느 정도 연배가 되어야 동수 자리에 올라 갈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적 가치]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상부상조와 공동노동, 그리고 구성원들 간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각종 契 조직이 결성되었는데, 구암동과 같은 어촌에서도 공동노동과 분배 및 어장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 조직이 확인된다. 본 자료에는 조선후기에 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구암동 공동체 조직의 洞員을 비롯한 洞任 명단이 나열되어 있어, 전통적인 어촌 공동체 조직의 일면을 살펴 볼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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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