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狗巖洞에서 결성되었던 어촌 공동체 조직의 1895년 座目으로 洞首 8명과 有司 4명의 성명을 기재
開國伍百肆年乙未十月十五日洞中座目成冊 洞首與有司宴冊
[내용 및 특징]
慶尙北道蔚珍郡平海邑巨逸1里는 동해안과 접한 지역으로, 半農半漁의 촌락이 형성되어 있다. 특히 어업이 발달하여 노동과 분배 및 이웃 마을과의 어장 경쟁 등에 공동 대응하기 위하여 일찍이 촌락단위의 공동체 조직이 결성되었었다. 거일1리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조선후기부터 확인된다. 당시 이 지역은 狗巖洞이라 불렸는데, 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에 속해 있었다.
거일1리 동중에는 어촌 공동체 조직과 관련된 각종 고문서류와 필사원본류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895년의 座目이다. 모두 2면으로 ‘開國伍百肆年乙未十月十日座目成冊’이란 제목으로 엮여져 있다. 그리고 제목 옆에는 ‘洞首與有司宴冊’이라 부기되어 있다. 부기된 것과 같이 본문에는 동수와 유사만 명기되어 있는데, 동수가 8명이며 유사는 4명이다. 동수와 유사는 어촌 공동체 조직에서 실질적인 업무를 수행하던 자리로, 구암동을 비롯하여 인근 어촌 촌락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동수와 유사 이외에 尊位라는 동임이 다른 자료에서 확인되는데, 존위는 촌락의 원로로 어업과 관련된 의사 결정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각종 제례를 책임지고 있었다. 즉 구암동에서의 洞任은 尊位, 洞首, 有司 체제로 운영되었으며, 본 자료에는 1895년 당시의 동수와 유사만 기재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자료에 기재된 12명의 성씨는 朴氏 5명, 崔氏 2명이며, 金,白,李,尹,方氏 각 1명씩이다. 구암동이 전통적인 반촌이 아니어서 入鄕 관련 문헌이 남아있지 않아 마을을 개척한 가문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씨, 김씨, 박씨가 시간을 달리하며 입향을 했다는 이야기가 마을에 전해져 오고 있을 뿐이다. 현재 구암동의 후신인 거일1리 거주민들 가운데는 密陽朴氏, 金海金氏, 慶州李氏, 慶州崔氏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당시 조직의 의사결정을 주도하던 가문을 추측하는데 참고가 된다.
[자료적 가치]
전통적인 어촌 공동체 조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상부상조와 공동노동, 그리고 구성원들 간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각종 契 조직이 결성되었다. 구암동과 같은 어촌에서도 공동노동과 분배 및 어장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 조직이 확인된다. 그런데 구암동의 洞任으로는 尊位, 洞首, 有司가 나타난다. 이러한 명칭은 조선중기 이후 향촌사회에 보급된 鄕約과 연관이 깊다. 전통적인 契 조직은 시기적,지역적 차이는 있으나 향약 보급 이후, 향약의 조직 및 규범과 접목되어 운영되어 갔다. 비교적 늦은 시기이나 구암동의 공동체 조직에서도 향약과 접목된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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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