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狗巖洞에서 결성되었던 어촌 공동체 조직의 1866년 座目으로 前尊位 2명과 時洞首 17명의 성명을 기재
同治伍年丙寅正月日狗巖洞洞員座目記
[내용 및 특징]
지금의 慶尙北道蔚珍郡平海邑巨逸1里는 동해안과 접한 곳으로 일찍이 半農半漁의 촌락을 형성하고 있는데, 특히 어업이 발달하여 조선후기 때부터 어업조직이 확인된다. 노동과 분배 및 이웃 마을과의 어장 경쟁 등에 공동 대응하기 위하여 일찍이 어촌에서는 공동노동조직이 결성되었으며, 현재의 漁村契가 이를 계승하고 있다. 거일1리는 조선후기까지 江原道平海郡下里面朴谷里에 편제된 곳으로, 본 자료의 좌목이 작성된 곳은 朴谷里에 속했던 狗巖洞이라는 반농반어의 마을이다.
구암동에서 어업을 위한 공동노동조직이 결성된 것은 19세기 중,후반 무렵으로 생각된다. 거일1리 洞中에는 어촌 조직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각종 고문서와 필사원본류가 보존되어 있는데, 정확한 연도가 확인되는 자료 중에서는 본 자료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1866년에 만들어진 ‘狗巖洞洞員座目記 同治伍年丙寅正月日’은 당시 어촌조직의 임원 성명이 나열되어 있다. 모두 19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2명은 前尊位이며, 17명은 時洞首이다. 그리고 말미에는 洞中의 手決과 洞首 金甲伊, 有司 朴啓聖의 수결이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확인되는 어촌 조직의 임원인 尊位와 洞首는 구암동을 비롯하여 인근 어촌 촌락에서도 나타난다. 존위는 마을의 원로로 구성되었는데 어업과 관련된 의사 결정과정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또한 마을에서 열리는 각종 제사를 주도하는 자리였다. 따라서 존위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서는 하부에서부터 차례차례 마을에 봉사한 이력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구암동에서는 존위 아래에 동수와 유사가 나타난다. 좌목에 존위와 동수만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구암동에서는 존위와 동수가 어업과 관련된 주요 사안에 대한 의사 결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유사는 이를 실무적으로 집행하는 자리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좌목에 기재된 임원 17명의 성씨를 살펴보면, 朴氏 8명, 金氏 5명, 崔氏 2명, 그 외 李氏,黃氏,白氏 각 1명이다. 구암동이 전통적인 반촌이 아니어서 入鄕 관련 문헌이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씨, 김씨, 박씨가 시간을 달리하며 입향을 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거일1리 거주민 가운데는 密陽朴氏, 金海金氏, 慶州李氏, 慶州崔氏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운영되었던 어촌 촌락 공동노동조직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일찍이 농촌에서는 두레와 같은 공동노동조직이 있었다. 또한 큰 일이 있을 경우 相扶相助하며 결속력을 다지는 각종 契 조직이 결성되었었다. 이러한 전통적 조직은 조선중기 이후 향약과 접목되어 그 시행범위에 따라 鄕約, 面約, 洞約, 里約 등의 형태로 나타났다. 생업의 특성상 구암동과 같은 어촌 촌락에서도 공동노동과 상부상조를 위한 조직이 일찍이 결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시기적으로 늦은 시기지만 향약과 접목되어 운영되었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尊位와 洞首는 전통적인 공동체 조직과 결부된 향약 조직에서 많이 발견되는 명칭이다. 조직 내 역할에서 어느 정도의 차이가 나지만, 향약의 영향을 받은 어촌 촌락 공동노동조직의 특성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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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蔚珍郡誌』, 蔚珍郡誌編纂委員會, 蔚珍郡, 2001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