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7년 경상도의령현에서 작성된 鄕案으로 1697년부터 1707년까지의 향안 입록자를 수록하여 18세기 전후 의령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
宜寧鄕案
[내용 및 특징]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 留鄕所 또는 鄕廳에 참여하는 鄕員들의 명부이다. 지역마다 시기적으로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16세기 중엽부터 향안 작성과 입록은 재지사족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사족들은 향안 입록의 기준을 엄격하게 제정함으로써 배타적으로 향안을 운영해나갔다. 하지만 17세기 중엽이후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성장한 新鄕들의 향안 입록 요구, 향권 주도권을 둘러싼 사족들 간의 경쟁, 營將節目 실시 이후 나타난 鄕任의 권위약화 등 複雜多技한 갈등 양상으로 향안 작성은 파행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慶尙道宜寧縣에서도 鄕案이 작성되었으며 현재 宜寧鄕校에는 鄕案 5책과 관련 고문서 및 필사원본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통해 위와 같은 의령에서의 향안 작성과 파행과정을 살펴 볼 수 있다. 본 향안에는 1697년부터 1707년까지 7회에 걸쳐 이루어진 입록자가 기재되어 있다. 남아 있는 의령향안 중 가장 후기의 입록자가 기재되어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원래 의령에서는 17세기 전후부터 향안이 작성되었고 늦어도 17세기 중엽까지는 지역 사족들의 공론에 의한 원활한 향안 입록이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1697~1707년 사이를 제외하고는 17세기 중엽이후 공론에 의해 입록이 이루어진 향안은 남아있지 않다. 의령에서도 여러 사회적 갈등으로 인해 17세기 중엽이후 향안 작성이 파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본 향안에서 확인되는 인물은 모두 48명으로 성명과 더불어 관직 및 직역이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 아울러 削名된 이름이 무려 53명에 달한다. 원래 기재되어 있었던 입록자 절반 이상의 이름이 훗날 칼로 도려내져 삭제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향안 입록을 둘러싼 갈등으로 야기되었다. 원래 삭명은 행적상의 문제가 있을 시 해당 인물을 퇴출한 뒤 명부에 가해졌고, 그 수가 많지 않았다. 하지만 1697년 향안에는 절반 이상의 인물이 삭명되었으며, 특정 가문에 치우쳐 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향안 입록을 둘러싸고 특정 가문들이 주도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발생하였다. 17세기 중엽이후 중단되었던 향안 입록이 재개되었지만 다시 향권을 둘러싼 갈등이 야기되었고, 그것이 향안의 대규모 削名으로 나타난 것이다.
모두 7회에 걸친 향안 입록의 규모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입록은 1697년 2월 20일에 있었으며, 直長南哲明 1명만 기재되어 있다. 두 번째 입록은 1698년 2월 20일에 있었는데 生員 李東柱만 확인되고 6명의 이름이 削名되어 있다. 세 번째 입록은 1698년 2월 24일에 있었는데 1명이 확인되고, 1명은 削名되어 있다. 네 번째는 1699년 6월 5일에 이루어졌으며 3명이 입록되었다. 다섯 번째는 1706년 10월 22일에 이루어졌고 3명이 입록되었다. 여섯 번째 입록은 1707년 10월 1일에 있었는데 15명의 이름이 확인되고 20명의 이름이 削名되었다. 마지막 일곱 번째는 1707년 10월 4일에 있었는데, 27명의 이름이 削名된 것으로 나타나며, 24명의 이름이 확인된다.
7회의 입록 가운데 첫 번째와 네 번째, 다섯 번째 입록 때는 削名 흔적이 없는데, 이때의 입록자는 전원 宜寧南氏로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가문 출신이다. 의령남씨는 의령을 본관으로 둔 대표적인 가문으로 주요 가문이 일찍이 의령을 떠나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거주하며 중앙관료를 많이 배출하고 있었다. 따라서 직접적으로 의령과 연관이 없는 가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향안뿐만 아니라 다른 의령향안에서도 의령에 거주하지 않는 의령남씨 입록자가 확인된다. 심지어 18세기 전반 이후 사실상 공론에 의한 향안 입록이 파행되었음에도 의령남씨는 꾸준히 입록되고 있다. 이는 의령의 재지사족들과 중앙의 의령남씨 가문과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의령의 사족들은 많은 관료를 배출하며 조선후기 閥閱가문의 하나로 성장한 의령남씨의 주요 인사를 입록시킴으로써 향안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 실재 본 향안에 입록되어 있는 의령남씨 7명의 관직이 直長, 郡守, 縣監, 統制事, 水使이며, 나머지 2명은 進士로 입록되어 있다. 의령의 사족들은 이들의 사회적 지위를 통해 향안의 권위를 높이려 하였으며, 아울러 이를 통해 중앙권력과 연결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려 했었다. 한편, 서울의 의령남씨 가문에서도 본관지이자 당색적으로 우파의 근거지가 되는 의령 사족의 협조와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17세기 전반부터 향안 입록을 꾸준히 전개해 나갔던 것이다.
두 번째, 세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 입록은 의령의 사족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다. 削名 흔적은 여기서만 확인된다. 의령남씨를 제외하고, 의령의 사족만 대상으로 한다면 41명 기재에 53명 削名이 된다. 기재된 41명의 성씨는 李氏 18명, 姜氏 10명, 權氏 5명, 安氏 3명, 鄭氏 2명, 韓,許,裵氏 각 1명이다. 이를 의령의 邑誌인 『宜春誌』와 각 가문의 족보를 통해 본관을 살펴보면 碧珍李氏, 晉州姜氏, 慶州李氏, 安東權氏, 耽津安氏의 비중이 높게 나타남을 확인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전 향안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潭陽田氏, 全義李氏, 固城李氏, 金海許氏, 密陽朴氏 등의 가문은 단 한명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 특히 담양전씨의 경우 이전까지 남아 있는 향안에서 입록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따라서 본 향안에서 削名된 인물 대다수가 입록이 누락된 가문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단된 향안 입록이 재개되었으나 18세기 전반기에 다시 향권을 둘러싼 의령지역 사족들 간의 갈등이 야기되었고, 그 결과 향안 파행과 더불어 대규모 削名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의령남씨를 제외한 41명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을 살펴보면, 幼學이 37명으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나머지 4명도 副護軍 1명, 通德郞 1명, 生員 2명으로 나타나 중앙관료 진출자는 찾아 볼 수가 없다. 향안 입록자의 유학 비중은 17세기 이후 꾸준히 증가하다 18세기 전후해서는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17세기 전후의 의령향안에서도 유학의 비중이 절반 이하이며, 고위직을 역임하고 당대를 대표했던 인사까지도 확인 할 수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유학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17세기 전후만 하더라도 재지사족의 중앙진출이 활발하였고, 특히 의령의 경우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했던 인사가 많이 배출되어 전란 후 중앙진출이 어렵지 않았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재지사족의 중앙진출이 둔화되고, 仁祖反正 이후에는 중앙권력의 閥閱化가 가속화되면서 재지사족은 정권에서 점점 소외되어 갔다. 이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관료출신의 향안 입록자가 줄어들고 유학의 비중이 높아지게 되었다.
이시기 향안의 작성이 원활하지 않았음은 뒷부분에 절단된 기록이 함께 엮여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뒷부분에는 여섯 면에 걸쳐 앞서 기재되었던 이름들이 다른 글씨체로 엮여져있다. 특히 1697년의 입록은 글씨체만 달리 세 차례나 중복 기재되어 있는데, 파행을 겪는 가운데 복수의 향안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한편 향안 마지막에는 ‘癸丑年先進案’이 엮여져 있으며, 乙丑(1685)正月初四日 날짜의 鄕首 李再茂의 手決이 있다. 계축년은 1673년이며, 先進은 향안 입록을 주도하는 원로급 인사들의 모임이다. 縣監을 역임한 郭聖衢를 포함해 7명이 기재되어 있는데 당시 선진들의 역할과 이때 선진안이 왜 본 향안과 함께 엮여져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안 입록을 둘러싼 재지사족들의 갈등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향안 입록을 통하여 고을 내 향권을 주도하려 했다. 하지만 17세기 중엽 이후 정치세력의 閥閱化에 따른 재지사족의 중앙진출이 어려워지자 향권을 둘러싼 사족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특히 향안 입록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다. 그런 가운데 18세기부터는 공론으로 인한 향안 작성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기 작성된 향안에서 특정 가문의 이름이 削名되는 사태다 빈번하게 나타나는 등 향안 입록이 파행되기에 이르렀다. 본 자료에서는 18세기 전반 향권을 둘러싼 의령지역 재지사족들 간의 갈등으로 향안이 파행되는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다.
『宜春誌』,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宜寧郡誌』, 宜寧郡誌編纂委員會, 宜寧郡, 2003
『南冥學硏究』20, 金俊亨, 慶尙大學校 慶南文化硏究院 南冥學硏究所, 2005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