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635년 경상도 의령현 의령향안(宜寧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WZ.1635.4872-20110630.Y1141904002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지역 경상남도 의령군
작성시기 1635
형태사항 크기: 39 X 29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26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령 의령향교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399
현소장처: 의령 의령향교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399

안내정보

1635년 경상도 의령현 의령향안(宜寧鄕案)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 또는 향청(鄕廳)의 구성원 명부를 향안(鄕案)이라 한다. 향안에 이름이 기재된 인물들은 당대 해당 고을을 대표하던 양반 가문 출신으로, 이를 매개로 지역 여론을 주도할 수 있었다. 지금의 경상남도의령군에도 조선중기 이후 작성되었던 의령향안(宜寧鄕案) 5책이 보존되어 있다. 이중 본 자료는 1635년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17세기 중엽까지 6차에 걸쳐 55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1655년부터 1885년까지 19차에 걸쳐 35명이 기재되어 있다. 앞선 55명은 모두 당대 의령을 대표하던 인사인 반면, 후대의 35명은 의령에 거주하지 않으며 본관만 의령인 의령남씨(宜寧南氏)라는 차이가 나타난다. 원래 의령향안에는 지역을 대표하던 인사와 더불어 향안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의령에 거주하지 않으나 의령을 본관으로 하는 의령남씨(宜寧南氏) 가문 출신이며 중앙관료를 역임했던 인사들이 함께 기재되었었다. 하지만 17세기 중엽 이후 향안 운영을 둘러싼 지역 양반가문들의 갈등으로 공론에 의한 향안 작성은 파행되기에 이르렀고, 다만 향안 운영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의령남씨들만 1885년까지 향안에 기재되었던 것이다.
이광우

상세정보

1635경상도의령현에서 만들어진 重修鄕案으로 1635년을 전후하여 6회에 걸쳐 입록된 향원 55명과 1655년부터 1885년까지 19회에 걸쳐 추가로 입록된 35명의 명단을 기재한 자료
宜寧鄕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留鄕所 또는 鄕廳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며, 이들의 명부를 鄕案이라 했다. 향안 입록자는 각 고을을 대표하던 인사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향안 입록의 추이와 입록자의 성격 분석을 통해 해당 고을의 향권 추이를 살펴 볼 수가 있다. 慶尙道宜寧縣에서도 17세기를 전후하여 향안이 작성되었는데, 현재 의령향교에 5책의 향안과 관련 고문서 및 필사원본류가 보존되어 있다.
시기적, 지역적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의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추세였다. 의령의 향안도 이 무렵까지는 엄격한 자격조건 하에 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작성되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부터 향권을 둘러싼 사족들 간의 갈등, 향안 입록을 요구하는 新鄕과 舊鄕과의 갈등 등 複雜多技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공론에 의한 향안 입록이 쉽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곧 향안 입록의 파행, 또는 旣 입록자의 削名 등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의령향안도 17세기 중반 이후 노정되기 시작한 갈등으로 18세기 초반까지의 기록만 남아 있다.
의령향안 5책은 17세기를 전후해서 18세기 초반까지 대략 100년 동안의 향원을 수록하고 있는데, 당시 향안 입록자의 성격뿐만 아니라 입록을 둘러싼 갈등 추이를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본 자료는 그 중 1635년에 중수된 宜寧鄕案으로 모두 88명이 입록되어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앞선 것은 6차에 걸쳐 입록된 향원의 명단으로 입록 시기는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다만 해당 시기 座首 1명과 別監 2명의 성명, 그리고 手決이 기재되어 있는 정도이다 모두 55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성명 위에 관직 및 직역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6차에 걸친 입록 중 1차 입록 때 가장 많은 20명이 기재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北人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南以雄, 南以恭, 南斗瞻이다. 이들은 본관만 宜寧일 뿐이지, 실제로는 서울경기도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의령지역 사족들과 의령을 떠난 의령남씨 가문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나타난 현상이다. 의령의 사족들은 중앙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의령남씨 가문 출신 인사를 입록시킴으로써 의령향안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 또 당색으로 北人, 小北을 표방했던 중앙의 의령남씨 가문으로서도 북인의 우파가 많은 경상우도의령 출신 사족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했기에 의령향안 입록에 협조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차 입록은 1618년 무렵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0명 모두 의령향교에 보존되어 있는 별도의 1618년 重修鄕案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남이웅 포함 3명은 1618년 중수향안의 표지 뒷부분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본 향안에서는 1차 입록에 다른 17명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때의 좌수는 田悅이며, 별감은 韓弘慶田華國로 기록되어 있는데, 1618년 중수향안에서도 좌수와 별감으로 수결이 남아 있기 때문에 1차 입록시기가 1618년경임을 뒷받침해준다.
2차 입록 때는 5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좌수는 朴瑞輝, 별감은 姜慶璜李洛傳이다. 앞서 언급한 1618년 중수향안 뒷부분에는 1620년 향안 입록자 9명이 추록되어 있다. 2차 입록자 5명은 9명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좌수와 별감 역시 동일하다. 이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2차 입록시기를 1620년경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추록자 9명 중 4명은 본 향안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3차 입록때는 11명이 기재되었으며 좌수는 李宗蕡, 별감은 裵袗田興國이다. 4차 때는 6명 입록에 좌수 이종분, 별감 田充國李性老이며, 5차 때는 8명 입록에 좌수 전충국, 별감 姜壎, 姜以昌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6차 때는 5명 입록에 좌수는 없고, 별감으로 李思遂姜垓만 기재되어 있다. 이상 3차에서 마지막 6차의 입록자는 다른 향안에서도 입록시기를 확인 할 수 없어, 입록 연대를 자세하게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의령의 邑誌인 『宜春誌』와 각 가문의 족보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생몰연대를 통해, 대략 1620년대 중반 이후부터 1650년 이전 사이에 입록이 이루어졌음을 추측 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시기 입록자의 성씨는 李氏 14명, 田氏 12명, 姜氏 8명, 安氏 4명, 南,金,鄭氏 각 3명, 韓氏 2명, 郭,權,盧,朴,許氏 각 1명 순이다. 이 중 남씨는 남이웅, 남이공, 남두첨으로 본관만 의령인 인사들이다. 『宜春誌』와 각 가문의 족보를 살펴보면 潭陽田氏, 晉州姜氏, 全義李氏, 耽津安氏, 碧珍李氏, 慶州李氏의 비중이 높음이 나타난다. 특히 담양전씨와 진주강씨 두 가문의 입록 비중이 높다. 원래 의령에는 남씨를 비롯하여, 沈,余,玉氏, 그리고 속현인 新繁縣의 陳,徐,任,石,吳氏 등의 토성이 있다. 이중 의령에서 번성한 토성은 남씨 일부 밖에 없으며, 다만 麗末鮮初 혼인을 매개로 妻鄕, 外鄕을 따라 정착한 위의 가문들이 의령의 대표적인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입록자의 성명 위에는 당시의 관직 및 직역이 부기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가장 많은 것은 幼學으로 총 55명중 절반 이상인 32명이다. 그 외 僉知 4명, 訓導察訪 각 3명, 參奉,判官,忠義 각 2명이며, 兵曹參判,判決事,別坐,奉事,,僉正,府使 각 1명씩 나타난다. 유학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뒤로 갈수록 유학의 비중은 높아진다. 가장 앞에 기재된 남이웅 이하 3명을 포함하면 유학의 비중은 더욱 증가한다. 1618년의 중수향안은 1618년 당대의 향안 입록자와 1618년 이전의 향안입록자로 나뉘어져 있는데, 1618년 이전 향안입록자의 경우 83명 중 유학은 26명밖에 되지 않는다. 17세기 전후만 하더라도 재지사족의 중앙진출이 활발하였고, 특히 의령의 경우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했던 인사가 많이 배출되어 전란 후 중앙진출이 어렵지 않았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재지사족의 중앙진출이 둔화되고, 仁祖反正 이후에는 중앙권력의 閥閱化가 가속화되면서 재지사족은 정권에서 점점 소외되어 갔다. 이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관료출신의 향안입록자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의령에서의 향안입록은 17세기 중반 이후, 지역 내 사족들 간의 향권경쟁으로 파행된 듯하다. 이후 향안 입록은 오랜 기간 중단되다 18세기 전후하여 약 10년간만 향안 작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0년간 입록된 향원은 별도의 1697년 의령향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6차에 걸친 향안 입록 뒤에는 1655년부터 1885년까지, 19차에 걸쳐 입록된 35명의 향안입록자가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의 입록은 앞선 6차의 입록과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앞선 입록은 의령지역 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지역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입록되어 있다. 하지만 17세기 중엽무렵부터 의령지역 사족들 간의 향권 다툼으로 공론에 의한 향안작성은 파행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1655년부터 의령에 거주하지 않고 있는 의령남씨들만 기재되어 있다. 이는 앞선 남이웅, 남이공, 남두첨의 입록과 같은 예로, 의령향안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서울, 경기도 일대에 거주하는 閥閱가문 출신의 의령남씨를 향안에 입록함으로써 향안의 권위를 높이려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령지역 사족들 간의 이해관계상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1655년부터 1885년까지 의령남씨 위주로 본 향안에 입록되어 있는 것이다.
1655년부터의 입록은 1655년 4월 3일 6명이 1차로 이루어졌고, 2차는 1662년 3월 21일에 5명, 3차는 1664년 9월 25일에 1명, 4차는 1682년 1월 3일에 3명, 5차는 1695년 9월 23일에 4명, 6차는 1696년 9월 12일에 1명, 7차는 1696년 12월 26일에 1명, 8차는 1718년 윤8월 25일에 2명(削名된 1명 제외), 9차는 1721년 9월 16일에 1명, 10차는 1728년 9월 3일에 1명, 11차는 1729년 4월 12일에 1명, 12차는 1730년 10월 7일에 1명, 13차는 1732년 12월 8일에 1명, 14차는 1746년 9월 3일에 1명, 15차는 1794년 1월 15일에 1명, 16차는 1798년 4월 29일에 2명, 17차는 1800년 1월 7일에 1명, 18차는 1829년 5월 11일에 1명, 19차는 1885년 9월 19일에 1명순으로 이루어졌다. 입록 당시의 鄕任이나 手決은 별도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
19차에 걸쳐 입록된 35명 중 1798년 4월 29일 입록자 金宗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령남씨이다. 김종선은 당시 宜寧縣監의 자격으로 입록된 듯하다. 수령의 향안 입록은 18세기 이후 증가하게 되는데, 향안의 권위를 높이려는 지역 사족들과 향안과 향규를 원활한 지방통치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수령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시기 입록된 34명의 의령남씨는 모두 의령에 거주하지 않는 인물들로 관료로 활동하거나, 중앙정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고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의령현감 역임자가 4명이며, 다른 고을의 수령이 11명, 지방 군사직 수행자가 6명이다. 그 외 대소과 합격자가 5명으로 나타나며, 유학은 6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령향안 작성이 파행되는 과정에서도 꾸준히 외지의 의령남씨가 향안에 입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의령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향안의 배타적 운영을 통해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고히 하려 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까지 지역 사족들의 공론과 엄격한 입록 기준 하에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사회, 경제적 변화 속에 향권을 둘러싼 사족들 간 갈등이 심화되고, 新鄕의 향권 도전 등에 따라 향안 작성은 파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상은 의령향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본 자료에서는 17세기 중엽까지 원활하게 이루어졌던 향안 입록과 17세기 중반~19세기 후반의 입록 파행 양상을 살펴 볼 수가 있다.
『宜春誌』,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宜寧郡誌』, 宜寧郡誌編纂委員會, 宜寧郡, 2003
『南冥學硏究』20, 金俊亨, 慶尙大學校 慶南文化硏究院 南冥學硏究所, 2005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35년 경상도 의령현 의령향안(宜寧鄕案)
宜寧鄕案
皇明崇禎八年乙亥十一月
日重修鄕案
僉知鄭大受
參奉田伏龍
嘉義大夫判決事南以雄
嘉善大夫兵曺叅判南以恭
判官安起宗
參奉李宗蕡
僉正田遇秋
通訓大夫行府使南斗膽
> >
>
幼學郭澧
>訓導李結
>奉事盧克諧
>忠義安孝一
>幼學姜慶璜
>
>
幼學鄭臁
僉知李洛傳
僉知韓弘慶
幼學田華國
幼學裵袗
幼學李命老
幼學李曼勝

座首田悅【別監韓弘慶
別監田華國[署押]

訓導金琢粹
幼學李重光
幼學李性老
察訪姜以興
幼學姜以昌

座首朴瑞輝【別監姜慶璜[署押]
別監李洛傳

僉知許稹
訓導權銖
判官田充國
幼學田興國
幼學金興世
幼學田復疇
幼學安寔
幼學田以井
幼學安寯
幼學李重輝
幼學田宜井

座首李宗蕡[署押]【別監裵袗[署押]
別監田興國[署押]

忠義鄭徽
李益茂
幼學田榮國
幼學姜壎
察訪李俊老
幼學田泰井

座首李宗蕡[署押]【別監田充國[署押]
別監李性老[署押]

幼學田以疇
幼學朴璡
幼學姜垓
幼學田尙疇
幼學李思遠
別坐李再茂
幼學李皣
幼學李思述

座首田充國[署押]【別監姜壎[署押]
別監姜以昌[署押]

幼學姜吉昇
幼學姜顯昇
察訪韓海
幼學姜敏昇
幼學金九成

座首【別監李思遂[署押]
別監姜垓[署押]

乙未四月初三日
觀察使南翧【子尙熏
益熏
五熏
致熏
至熏

宜寧縣監南斗長
軍威縣監南得朋
幼學南明夏
南益熏
南五熏【子一明

壬寅三月二十一日
僉正南斗極
叅判南斗柄
僉知南斗機
縣監南斗樞
幼學南澂
甲辰九月二十五日
營將南壽星

觀察使南銑
觀察使南龍翼
宜寧縣監南得衡
壬戌正月初三日
星州牧使南尙熏【子就明近明

慶州府尹南致熏【孫泰齊

承文正字南就明
司饔奉事南淵
乙亥九月二十三日
晋州牧使南至熏
丙子九月十二日
幼學南永熏
丙子十二月二十六日
參奉南壽明【子泰運

■……■
幼學南確
壬戌閏八月二十五日
兵虞候南正夏
辛丑九月十六日
咸昌縣監南近明【子泰耆

戊申九月三日
進士南德熏
己酉四月十二日
本道都事南泰齊
庚戌十月初七日
及第南泰耆
壬子十二月初八日
本道都事南德老
丙寅九月初三日
宜寧縣監南麟耉
甲寅正月十五日
晋州牧使南寅老
固城縣監南履翼
戊午四月二十九日
行縣監金宗善
庚申正月初七日
宜寧縣監南久淳
己丑五月十一日
觀察使南一祐
乙酉九月十九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