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留鄕所 또는 鄕廳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며, 이들의 명부를 鄕案이라 했다. 향안 입록자는 각 고을을 대표하던 인사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향안 입록의 추이와 입록자의 성격 분석을 통해 해당 고을의 향권 추이를 살펴 볼 수가 있다. 慶尙道宜寧縣에서도 17세기를 전후하여 향안이 작성되었는데, 현재 의령향교에 5책의 향안과 관련 고문서 및 필사원본류가 보존되어 있다.
시기적, 지역적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17세기 중엽까지의 향안 입록은 재지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이루어지는 추세였다. 의령의 향안도 이 무렵까지는 엄격한 자격조건 하에 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작성되었다. 하지만 17세기 후반부터 향권을 둘러싼 사족들 간의 갈등, 향안 입록을 요구하는 新鄕과 舊鄕과의 갈등 등 複雜多技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공론에 의한 향안 입록이 쉽지 않게 되었다. 이는 곧 향안 입록의 파행, 또는 旣 입록자의 削名 등의 현상으로 나타났다. 의령향안도 17세기 중반 이후 노정되기 시작한 갈등으로 18세기 초반까지의 기록만 남아 있다.
의령향안 5책은 17세기를 전후해서 18세기 초반까지 대략 100년 동안의 향원을 수록하고 있는데, 당시 향안 입록자의 성격뿐만 아니라 입록을 둘러싼 갈등 추이를 살펴 볼 수 있게 해준다. 본 자료는 그 중 1635년에 중수된 宜寧鄕案으로 모두 88명이 입록되어 있는데,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앞선 것은 6차에 걸쳐 입록된 향원의 명단으로 입록 시기는 기입되어 있지 않으며, 다만 해당 시기 座首 1명과 別監 2명의 성명, 그리고 手決이 기재되어 있는 정도이다 모두 55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성명 위에 관직 및 직역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6차에 걸친 입록 중 1차 입록 때 가장 많은 20명이 기재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인물은 北人의 대표적인 인사였던 南以雄, 南以恭, 南斗瞻이다. 이들은 본관만 宜寧일 뿐이지, 실제로는 서울과 경기도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는 의령지역 사족들과 의령을 떠난 의령남씨 가문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나타난 현상이다. 의령의 사족들은 중앙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의령남씨 가문 출신 인사를 입록시킴으로써 의령향안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 또 당색으로 北人, 小北을 표방했던 중앙의 의령남씨 가문으로서도 북인의 우파가 많은 경상우도의령 출신 사족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했기에 의령향안 입록에 협조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차 입록은 1618년 무렵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0명 모두 의령향교에 보존되어 있는 별도의 1618년 重修鄕案에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다만 남이웅 포함 3명은 1618년 중수향안의 표지 뒷부분에 추가로 기재되어 있었으나, 본 향안에서는 1차 입록에 다른 17명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때의 좌수는 田悅이며, 별감은 韓弘慶과 田華國로 기록되어 있는데, 1618년 중수향안에서도 좌수와 별감으로 수결이 남아 있기 때문에 1차 입록시기가 1618년경임을 뒷받침해준다.
2차 입록 때는 5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좌수는 朴瑞輝, 별감은 姜慶璜과 李洛傳이다. 앞서 언급한 1618년 중수향안 뒷부분에는 1620년 향안 입록자 9명이 추록되어 있다. 2차 입록자 5명은 9명 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좌수와 별감 역시 동일하다. 이를 바탕으로 대략적인 2차 입록시기를 1620년경으로 파악할 수 있다. 한편 추록자 9명 중 4명은 본 향안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검토가 필요하다.
3차 입록때는 11명이 기재되었으며 좌수는 李宗蕡, 별감은 裵袗과 田興國이다. 4차 때는 6명 입록에 좌수 이종분, 별감 田充國과 李性老이며, 5차 때는 8명 입록에 좌수 전충국, 별감 姜壎, 姜以昌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6차 때는 5명 입록에 좌수는 없고, 별감으로 李思遂와 姜垓만 기재되어 있다. 이상 3차에서 마지막 6차의 입록자는 다른 향안에서도 입록시기를 확인 할 수 없어, 입록 연대를 자세하게 추정하기 어렵다. 다만 의령의 邑誌인 『宜春誌』와 각 가문의 족보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생몰연대를 통해, 대략 1620년대 중반 이후부터 1650년 이전 사이에 입록이 이루어졌음을 추측 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시기 입록자의 성씨는 李氏 14명, 田氏 12명, 姜氏 8명, 安氏 4명, 南,金,鄭氏 각 3명, 韓氏 2명, 郭,權,盧,朴,許氏 각 1명 순이다. 이 중 남씨는 남이웅, 남이공, 남두첨으로 본관만 의령인 인사들이다. 『宜春誌』와 각 가문의 족보를 살펴보면 潭陽田氏, 晉州姜氏, 全義李氏, 耽津安氏, 碧珍李氏, 慶州李氏의 비중이 높음이 나타난다. 특히 담양전씨와 진주강씨 두 가문의 입록 비중이 높다. 원래 의령에는 남씨를 비롯하여, 沈,余,玉氏, 그리고 속현인 新繁縣의 陳,徐,任,石,吳氏 등의 토성이 있다. 이중 의령에서 번성한 토성은 남씨 일부 밖에 없으며, 다만 麗末鮮初 혼인을 매개로 妻鄕, 外鄕을 따라 정착한 위의 가문들이 의령의 대표적인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입록자의 성명 위에는 당시의 관직 및 직역이 부기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가장 많은 것은 幼學으로 총 55명중 절반 이상인 32명이다. 그 외 僉知 4명, 訓導와 察訪 각 3명, 參奉,判官,忠義 각 2명이며, 兵曹參判,判決事,別坐,奉事,正,僉正,府使 각 1명씩 나타난다. 유학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뒤로 갈수록 유학의 비중은 높아진다. 가장 앞에 기재된 남이웅 이하 3명을 포함하면 유학의 비중은 더욱 증가한다. 1618년의 중수향안은 1618년 당대의 향안 입록자와 1618년 이전의 향안입록자로 나뉘어져 있는데, 1618년 이전 향안입록자의 경우 83명 중 유학은 26명밖에 되지 않는다. 17세기 전후만 하더라도 재지사족의 중앙진출이 활발하였고, 특히 의령의 경우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 했던 인사가 많이 배출되어 전란 후 중앙진출이 어렵지 않았었다. 하지만 후기로 갈수록 재지사족의 중앙진출이 둔화되고, 仁祖反正 이후에는 중앙권력의 閥閱化가 가속화되면서 재지사족은 정권에서 점점 소외되어 갔다. 이에 따라 시간이 갈수록 관료출신의 향안입록자가 줄어들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의령에서의 향안입록은 17세기 중반 이후, 지역 내 사족들 간의 향권경쟁으로 파행된 듯하다. 이후 향안 입록은 오랜 기간 중단되다 18세기 전후하여 약 10년간만 향안 작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0년간 입록된 향원은 별도의 1697년 의령향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6차에 걸친 향안 입록 뒤에는 1655년부터 1885년까지, 19차에 걸쳐 입록된 35명의 향안입록자가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이때의 입록은 앞선 6차의 입록과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앞선 입록은 의령지역 사족들의 공론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지역의 명망 있는 인사들이 입록되어 있다. 하지만 17세기 중엽무렵부터 의령지역 사족들 간의 향권 다툼으로 공론에 의한 향안작성은 파행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1655년부터 의령에 거주하지 않고 있는 의령남씨들만 기재되어 있다. 이는 앞선 남이웅, 남이공, 남두첨의 입록과 같은 예로, 의령향안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의도로 이루어진 것이다. 서울, 경기도 일대에 거주하는 閥閱가문 출신의 의령남씨를 향안에 입록함으로써 향안의 권위를 높이려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의령지역 사족들 간의 이해관계상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따라 1655년부터 1885년까지 의령남씨 위주로 본 향안에 입록되어 있는 것이다.
1655년부터의 입록은 1655년 4월 3일 6명이 1차로 이루어졌고, 2차는 1662년 3월 21일에 5명, 3차는 1664년 9월 25일에 1명, 4차는 1682년 1월 3일에 3명, 5차는 1695년 9월 23일에 4명, 6차는 1696년 9월 12일에 1명, 7차는 1696년 12월 26일에 1명, 8차는 1718년 윤8월 25일에 2명(削名된 1명 제외), 9차는 1721년 9월 16일에 1명, 10차는 1728년 9월 3일에 1명, 11차는 1729년 4월 12일에 1명, 12차는 1730년 10월 7일에 1명, 13차는 1732년 12월 8일에 1명, 14차는 1746년 9월 3일에 1명, 15차는 1794년 1월 15일에 1명, 16차는 1798년 4월 29일에 2명, 17차는 1800년 1월 7일에 1명, 18차는 1829년 5월 11일에 1명, 19차는 1885년 9월 19일에 1명순으로 이루어졌다. 입록 당시의 鄕任이나 手決은 별도로 표기되어 있지 않다.
19차에 걸쳐 입록된 35명 중 1798년 4월 29일 입록자 金宗善을 제외하고는 모두 의령남씨이다. 김종선은 당시 宜寧縣監의 자격으로 입록된 듯하다. 수령의 향안 입록은 18세기 이후 증가하게 되는데, 향안의 권위를 높이려는 지역 사족들과 향안과 향규를 원활한 지방통치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수령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나타난 현상이다. 이시기 입록된 34명의 의령남씨는 모두 의령에 거주하지 않는 인물들로 관료로 활동하거나, 중앙정계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인물들이다. 특히 고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의령현감 역임자가 4명이며, 다른 고을의 수령이 11명, 지방 군사직 수행자가 6명이다. 그 외 대소과 합격자가 5명으로 나타나며, 유학은 6명에 불과하다. 이러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령향안 작성이 파행되는 과정에서도 꾸준히 외지의 의령남씨가 향안에 입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의령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향안의 배타적 운영을 통해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고히 하려 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까지 지역 사족들의 공론과 엄격한 입록 기준 하에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사회, 경제적 변화 속에 향권을 둘러싼 사족들 간 갈등이 심화되고, 新鄕의 향권 도전 등에 따라 향안 작성은 파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양상은 의령향안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본 자료에서는 17세기 중엽까지 원활하게 이루어졌던 향안 입록과 17세기 중반~19세기 후반의 입록 파행 양상을 살펴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