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지방 통치는 國王에서 監司, 守令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관치행정 계통과 京在所에서 留鄕所 또는 鄕廳, 面里任으로 이어지는 자치행정계통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이 중 一鄕의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 또는 향청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며, 그 명단을 鄕案이라 했다. 사족들은 향안에 입록됨으로써 향권 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역적,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향안 입록자들의 성격 분석을 통해 해당 고을의 향권 주도세력을 파악 할 수 있는 것이다. 향안이 본격적으로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엽 이후이다. 16세기 이후 사림세력에 의해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서서히 확립되자, 유향소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함으로써 향권을 주도해 나갔고, 신흥 사족의 참여를 배제한 배타적 향안 작성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유지해 나갔다.
慶尙道宜寧縣에서도 17세기를 전후하여 재지사족들이 주도한 향안이 작성되었으며, 5책의 향안과 관련 자료들이 지금까지 宜寧鄕校에 보존되어 있다. 의령향안의 입록은 17세기 전후 시작되어 대략 100년간 이루어졌다. 의령뿐만 아니라 상당수 고을의 향안 작성은 대체로 18세기 무렵에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향안 입록을 둘러싸고 複雜多技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었기에, 一鄕 사족의 공론에 의한 향안 작성이 중단되고 파행되기에 이른 것이다. 의령에서도 17세기 후반부터 향안 입록을 둘러싼 각종 갈등이 야기되어, 18세기 초반 이후로는 향안이 작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본 향안은 의령향교에 소장된 5책 중 1618년에 작성된 것으로 137명이 입록되어 있는데, 네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皇明萬曆十六年戊午二月日重修鄕案’이 두 차례 나뉘어져 기재되어 있다. 이중 앞의 것은 1618년 이전 의령향안 입록자를 수록하였다. 모두 83명으로, 관직 및 직역과 함께 기재되어 있다. 성씨별로는 李氏 19명, 姜氏 13명, 田氏 10명, 鄭氏 10명, 許氏 6명, 金氏 5명, 裵氏 4명, 安氏 4명, 郭氏 3명, 南氏 2명, 吳氏 2명, 曹氏 2명으로 나타나며, 그 외 趙,河,沈,朴氏 등이 확인된다. 입록자의 본관을 의령지역의 邑誌와 주요 가문의 족보 등을 통해 살펴보면 晉州姜氏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다음이 潭陽田氏, 金海許氏, 碧珍李氏, 盆城裵氏, 固城李氏, 草溪鄭氏, 玄風郭氏 순이다. 의령의 대표적인 土姓인 宜寧南氏는 2명이 입록되어 있다. 의령의 邑誌인 『宜春誌』에 따르면 이들 가문은 주로 麗末鮮初에 혼인을 매개로 妻鄕이나 外鄕을 따라 의령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토성인 남씨가 적은데, 의령남씨의 주요 가문은 일찍이 중앙에 진출하여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1618년 이전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을 살펴보면 단연 幼學이 26명으로 가장 많다. 그 외에는 參奉 12명, 忠義 6명, 忠順 5명, 僉知 4명, 萬戶 3명, 正 3명, 主簿 3명, 同知 2명, 僉正 2명, 權管 2명, 縣監 2명, 奉事 2명이며, 進士, 部將, 承旨, 正言, 府尹, 監司, 僉使, 守門, 內禁 등 다양한 관직과 직역, 그리고 兵種이 확인된다. 특히 유학의 비중이 다른 시기에 비해 낮으며 郭再祐, 吳澐, 李魯 등과 같이 文科에 급제한 뒤 지역 출신으로 크게 이름을 알린 인물들을 입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재지사족의 중앙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관료 출신의 입록자가 많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령 출신의 의병장이 많았던 것도 문무 관직 진출자를 많이 배출한 까닭이 된다.
두 번째 ‘皇明萬曆十六年戊午二月日重修鄕案’ 입록자 42명은 1618년 2월, 본 향안이 成冊 될 당시의 입록자인 것으로 생각된다. 성씨는 李氏 10명, 田氏 9명, 姜氏 3명, 曹氏 3명, 金氏 2명, 南氏 2명, 安氏 2명이며, 成,沈,朴,吳,郭,裵,韓,盧氏 각 1명 순이다. 입록자의 본관 비율은 담양전씨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昌寧成氏와 光州盧氏 처음으로 나타난다.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은 幼學 12명을 비롯하여 僉知 5명, 參奉과 縣監 각 3명, 進士, 察訪, 判官 각 2명이며, 司諫, 直長, 主簿, 部將, 虞侯, 訓導, 奉事, 生員, 僉正, 兵使가 확인된다. 명단 가장 마지막에는 鄕任인 座首 1명과 別監 2명의 手決이 있다. 당시 좌수는 현감을 역임한 田悅이며, 別監은 유학인 韓弘慶과 田華國이다.
입록자의 비중과 향임의 가문으로 보아 이 시기 의령의 사족 중 담양전씨의 족세가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담양전씨 역시, 조선전기 때 의령에 정착한 가문으로 특히 무과 급제자를 많이 배출했던 가문이다. 이때 입록된 인물 중 주목되는 자는 兵使南以興이다. 남이흥의 본관은 의령이나, 그 가문은 오래전 의령을 떠나 서울과 그 인근에 거주하며 많은 관료를 배출하였다. 이는 의령지역 사족들과 의령을 떠난 의령남씨 가문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나타난 현상이다. 의령의 사족들은 중앙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의령남씨 가문 출신 인사를 입록시킴으로써 의령향안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 또 당색으로 北人, 小北을 표방했던 중앙의 의령남씨 가문으로서도 북인의 우파가 많은 경상우도 의령 출신 사족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했기에 의령향안 입록에 협조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남이흥의 이름 아래에는 세주로 아들 南斗樞가 壬寅(1622)에 의령현감이 되었기에 題名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622년은 향안이 작성된 1618년과 많은 차이가 난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향안의 가장 말미에는 1620년인 ‘萬曆四十八年三月日’의 입록자가 追錄되어 있다. 이때의 명단은 1618년에 중수향안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책 이후 새롭게 추가 기재한 것이다. 모두 9명으로 訓導金琢粹를 제외하고는 유학이며, 이 중 진주강씨가 3명 입록되어 있다. 말미에 좌수 朴瑞輝와 별감 姜慶璜, 李洛傳의 수결이 있다.
마지막으로 본 향안의 1면, 즉 ‘皇明萬曆十六年戊午二月日重修鄕案’ 앞에는 별도로 嘉義大夫判決事南以雄, 嘉善大夫兵曹參判南以恭, 通訓大夫行賑恤使南斗瞻이 차례대로 기재되어 있다. 글씨체로 보아 후기에 차례대로 추가 입록한 듯하다. 모두 의령을 본관으로 하는 의령남씨 출신으로, 그 선조들은 이른 시기 서울과 경기도 일대로 이주한 후 중앙관료를 많이 배출하였었다. 특히 이들은 당대를 대표하던 小北 인사였다. 앞에서 언급한 남이흥과 같은 이유로 의령향안에 추가로 입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남이웅, 남이공, 남두첨은 모두 1635년 작성된 ‘皇明崇禎八年乙亥十一月日重修鄕案’에 1618년 당시 입록자와 함께 기재되어 있어, 공식적인 입록시기는 1635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전반 의령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과 향안의 운영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6세기 중엽 이후 사족들은 留鄕所 및 鄕廳 운영을 주도해나가며, 吏族을 배제하고 사족 중심의 배타적인 향안을 작성해 나갔었다. 이러한 향안 작성의 전성기는 임진왜란 직후이다. 각 고을의 재지사족들은 전란 복구와 더불어 어수선해진 향촌질서를 사족중심으로 재확립하기 위하여 향안 중수에 집중했던 것이다. 의령 지역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를 비롯해 많은 의병이 배출된 곳으로, 전란 이후 향안 작성도 의병 출신과 그 후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본 향안 입록자는 총 5책의 현존 의령향안 중 가장 이른 시기 인물들을 입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