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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 경상도 의령현 의령향안(宜寧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WZ.1618.4872-20110630.Y114190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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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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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지역 경상남도 의령군
작성시기 1618
형태사항 크기: 42 X 28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31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의령 의령향교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399
현소장처: 의령 의령향교 /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서동리 399

안내정보

1618년 경상도 의령현 의령향안(宜寧鄕案)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 또는 향청(鄕廳) 구성원 명부이다. 향안에 이름이 기재되었다는 것은 해당 고을의 지역 여론을 주도하는 대표적인 양반 가문임을 보장 받는 것이기 때문에, 조선중기 이후 양반들은 향안 운영에 주력해 나갔다. 경상남도의령의 향안은 모두 5책이 전해지는데 본 자료는 1618년에 작성된 것으로, 1618년 이전의 향안 입록자 83명과 1618년 당시의 입록자 42명 1620년 추가 입록자 9명, 기타 추가 입록자 3명 등 137명이 기재되어 있어 당시 의령지역의 여론을 주도하던 양반들의 면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광우

상세정보

1618경상도의령현에서 만들어진 重修鄕案으로 1618년 이전 입록자 83명, 1618년 당대의 입록자 42명, 1620년 추가 입록자 9명, 기타 추가 입록자 3명 등 모두 137명에 이르는 鄕員을 수록
宜寧鄕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지방 통치는 國王에서 監司, 守令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관치행정 계통과 京在所에서 留鄕所 또는 鄕廳, 面里任으로 이어지는 자치행정계통으로 크게 나눌 수가 있다. 이 중 一鄕의 지방자치기구인 유향소 또는 향청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며, 그 명단을 鄕案이라 했다. 사족들은 향안에 입록됨으로써 향권 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다. 지역적, 시기적 차이는 있지만 향안 입록자들의 성격 분석을 통해 해당 고을의 향권 주도세력을 파악 할 수 있는 것이다. 향안이 본격적으로 작성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중엽 이후이다. 16세기 이후 사림세력에 의해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서서히 확립되자, 유향소 운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함으로써 향권을 주도해 나갔고, 신흥 사족의 참여를 배제한 배타적 향안 작성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확고히 유지해 나갔다.
慶尙道宜寧縣에서도 17세기를 전후하여 재지사족들이 주도한 향안이 작성되었으며, 5책의 향안과 관련 자료들이 지금까지 宜寧鄕校에 보존되어 있다. 의령향안의 입록은 17세기 전후 시작되어 대략 100년간 이루어졌다. 의령뿐만 아니라 상당수 고을의 향안 작성은 대체로 18세기 무렵에 중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향안 입록을 둘러싸고 複雜多技한 사회적 갈등이 야기되었기에, 一鄕 사족의 공론에 의한 향안 작성이 중단되고 파행되기에 이른 것이다. 의령에서도 17세기 후반부터 향안 입록을 둘러싼 각종 갈등이 야기되어, 18세기 초반 이후로는 향안이 작성되지 않았던 것이다.
본 향안은 의령향교에 소장된 5책 중 1618년에 작성된 것으로 137명이 입록되어 있는데, 네시기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먼저 ‘皇明萬曆十六年戊午二月日重修鄕案’이 두 차례 나뉘어져 기재되어 있다. 이중 앞의 것은 1618년 이전 의령향안 입록자를 수록하였다. 모두 83명으로, 관직 및 직역과 함께 기재되어 있다. 성씨별로는 李氏 19명, 姜氏 13명, 田氏 10명, 鄭氏 10명, 許氏 6명, 金氏 5명, 裵氏 4명, 安氏 4명, 郭氏 3명, 南氏 2명, 吳氏 2명, 曹氏 2명으로 나타나며, 그 외 趙,河,沈,朴氏 등이 확인된다. 입록자의 본관을 의령지역의 邑誌와 주요 가문의 족보 등을 통해 살펴보면 晉州姜氏가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다음이 潭陽田氏, 金海許氏, 碧珍李氏, 盆城裵氏, 固城李氏, 草溪鄭氏, 玄風郭氏 순이다. 의령의 대표적인 土姓인 宜寧南氏는 2명이 입록되어 있다. 의령의 邑誌인 『宜春誌』에 따르면 이들 가문은 주로 麗末鮮初에 혼인을 매개로 妻鄕이나 外鄕을 따라 의령에 정착한 것으로 나타난다. 상대적으로 토성인 남씨가 적은데, 의령남씨의 주요 가문은 일찍이 중앙에 진출하여 서울경기도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1618년 이전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을 살펴보면 단연 幼學이 26명으로 가장 많다. 그 외에는 參奉 12명, 忠義 6명, 忠順 5명, 僉知 4명, 萬戶 3명, 3명, 主簿 3명, 同知 2명, 僉正 2명, 權管 2명, 縣監 2명, 奉事 2명이며, 進士, 部將, 承旨, 正言, 府尹, 監司, 僉使, 守門, 內禁 등 다양한 관직과 직역, 그리고 兵種이 확인된다. 특히 유학의 비중이 다른 시기에 비해 낮으며 郭再祐, 吳澐, 李魯 등과 같이 文科에 급제한 뒤 지역 출신으로 크게 이름을 알린 인물들을 입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재지사족의 중앙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관료 출신의 입록자가 많았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의령 출신의 의병장이 많았던 것도 문무 관직 진출자를 많이 배출한 까닭이 된다.
두 번째 ‘皇明萬曆十六年戊午二月日重修鄕案’ 입록자 42명은 1618년 2월, 본 향안이 成冊 될 당시의 입록자인 것으로 생각된다. 성씨는 李氏 10명, 田氏 9명, 姜氏 3명, 曹氏 3명, 金氏 2명, 南氏 2명, 安氏 2명이며, 成,沈,朴,吳,郭,裵,韓,盧氏 각 1명 순이다. 입록자의 본관 비율은 담양전씨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昌寧成氏와 光州盧氏 처음으로 나타난다.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은 幼學 12명을 비롯하여 僉知 5명, 參奉縣監 각 3명, 進士, 察訪, 判官 각 2명이며, 司諫, 直長, 主簿, 部將, 虞侯, 訓導, 奉事, 生員, 僉正, 兵使가 확인된다. 명단 가장 마지막에는 鄕任인 座首 1명과 別監 2명의 手決이 있다. 당시 좌수는 현감을 역임한 田悅이며, 別監은 유학인 韓弘慶田華國이다.
입록자의 비중과 향임의 가문으로 보아 이 시기 의령의 사족 중 담양전씨의 족세가 강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담양전씨 역시, 조선전기 때 의령에 정착한 가문으로 특히 무과 급제자를 많이 배출했던 가문이다. 이때 입록된 인물 중 주목되는 자는 兵使南以興이다. 남이흥의 본관은 의령이나, 그 가문은 오래전 의령을 떠나 서울과 그 인근에 거주하며 많은 관료를 배출하였다. 이는 의령지역 사족들과 의령을 떠난 의령남씨 가문의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나타난 현상이다. 의령의 사족들은 중앙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의령남씨 가문 출신 인사를 입록시킴으로써 의령향안의 권위를 높이려 했다. 또 당색으로 北人, 小北을 표방했던 중앙의 의령남씨 가문으로서도 북인의 우파가 많은 경상우도 의령 출신 사족의 정치적 지원이 필요했기에 의령향안 입록에 협조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남이흥의 이름 아래에는 세주로 아들 南斗樞가 壬寅(1622)에 의령현감이 되었기에 題名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622년은 향안이 작성된 1618년과 많은 차이가 난다. 여기에 대해서는 좀 더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향안의 가장 말미에는 1620년인 ‘萬曆四十八年三月日’의 입록자가 追錄되어 있다. 이때의 명단은 1618년에 중수향안과 함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성책 이후 새롭게 추가 기재한 것이다. 모두 9명으로 訓導金琢粹를 제외하고는 유학이며, 이 중 진주강씨가 3명 입록되어 있다. 말미에 좌수 朴瑞輝와 별감 姜慶璜, 李洛傳의 수결이 있다.
마지막으로 본 향안의 1면, 즉 ‘皇明萬曆十六年戊午二月日重修鄕案’ 앞에는 별도로 嘉義大夫判決事南以雄, 嘉善大夫兵曹參判南以恭, 通訓大夫行賑恤使南斗瞻이 차례대로 기재되어 있다. 글씨체로 보아 후기에 차례대로 추가 입록한 듯하다. 모두 의령을 본관으로 하는 의령남씨 출신으로, 그 선조들은 이른 시기 서울경기도 일대로 이주한 후 중앙관료를 많이 배출하였었다. 특히 이들은 당대를 대표하던 小北 인사였다. 앞에서 언급한 남이흥과 같은 이유로 의령향안에 추가로 입록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남이웅, 남이공, 남두첨은 모두 1635년 작성된 ‘皇明崇禎八年乙亥十一月日重修鄕案’에 1618년 당시 입록자와 함께 기재되어 있어, 공식적인 입록시기는 1635년 이전임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전반 의령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과 향안의 운영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6세기 중엽 이후 사족들은 留鄕所 및 鄕廳 운영을 주도해나가며, 吏族을 배제하고 사족 중심의 배타적인 향안을 작성해 나갔었다. 이러한 향안 작성의 전성기는 임진왜란 직후이다. 각 고을의 재지사족들은 전란 복구와 더불어 어수선해진 향촌질서를 사족중심으로 재확립하기 위하여 향안 중수에 집중했던 것이다. 의령 지역의 경우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를 비롯해 많은 의병이 배출된 곳으로, 전란 이후 향안 작성도 의병 출신과 그 후손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 특징이다. 또한 본 향안 입록자는 총 5책의 현존 의령향안 중 가장 이른 시기 인물들을 입록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宜春誌』,
『嶺南士林派의 形成』, 李樹健, 嶺南大學校 出版部, 1979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宜寧郡誌』, 宜寧郡誌編纂委員會, 宜寧郡, 2003
『南冥學硏究』20, 金俊亨, 慶尙大學校 慶南文化硏究院 南冥學硏究所, 2005
이광우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18년 경상도 의령현 의령향안(宜寧鄕案)
宜寧鄕案
嘉義大夫判決事南以雄
嘉善大夫兵曺參判南以恭
通訓大夫行賑恤使
斗贍【子乙未年觀察使題名

皇明萬曆四十六年戊午二月日
重修鄕案
參奉姜慶孫
幼學姜珷
忠順姜璹
參奉鄭士亢
忠義南世禧
萬戶田灌
田希舜
僉知田活
萬戶朴士信
進士許士廉
忠順金光輔
幼學田希尹
參奉鄭士貞
同知許允廉
萬戶曹世憲
部將張世琛
主簿姜復敦
僉正姜復休
權管裵景霖
參奉吳世起
參奉李蓁
幼學李天民
忠順裵景雲
鄭雲龍
僉知鄭演
幼學田澤
僉正田潭
主簿許澍
幼學裵景霽
忠義安國老
永旨李宥
僉知李長文
參奉李鐵城
幼學田復隆
同知許彦深
幼學田復興
僉知沈安麟
幼學李曄
參奉金謹行
幼學田演
幼學郭再禧
幼學郭再祿
正言李魯
忠義鄭光祖
幼學李天慶
幼學李天祥
幼學金光胤
生員李雲起
幼學姜士豪
府尹吳澐
監司郭再祐
參奉鄭胤光
參奉曹季憲
忠義鄭光宗
生員李宗榮
奉事金聲振
忠順鄭夢虎
縣監李紳
參奉安仁
忠順姜福男
守門姜起龍
幼學姜士俊
幼學李山立
幼學李旨
幼學鄭仁止
參奉姜燉
幼學姜熺
幼學姜奇男
忠義南宙
縣監李增壽
參奉許巖
僉使趙鵬
幼學金泳
幼學許䆃
幼學李約
內禁田千秋
幼學李綬
姜遇璜
權管河萬祺
奉事李應命
主簿李得春
幼學裵孟仁
忠義鄭復

皇明萬曆四十六年戊午
月日重修鄕案
僉知沈潜
幼學曺鼎臣
察訪姜彦龍
幼學金彦虎
進士成汝信
僉知姜運
僉知李思顔
僉知金城漢
參奉曺弘業
幼學田有龍
忠義南克鎛
直長李夢瑞
縣監李宗彬
部將田悅
僉知鄭大受
虞候朴瑞輝
參奉田伏龍
司諫吳汝檼
兵使南以興【子斗樞壬寅年
題名

主簿田恊
直長田景龍
判官安起宗
縣監田時雨
參奉李宗蕡
僉正田遇秋
幼學李宗郁
幼學郭澧
進士田好雨
訓導李結
奉事盧克諧
判官曺仕偉
縣監姜遵
忠義安孝一
幼學姜慶璜
幼學鄭賺
察訪李洛傳
幼學韓弘慶
幼學田華國
生員李宗立
幼學裵袗
幼學李命老
幼學李曼勝

座首田悅[署押]【別監韓弘慶[署押]
別監田華國[署押]

訓導金琢粹
幼學李重光
幼學田復疇
李性老
朴瑾
姜以興
姜壎
朴瑠
姜以昌

萬曆四十八年三月日
座首朴瑞輝[署押]別監【姜慶璜[署押]
李洛傳[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