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각 고을에는 留鄕所가 운영되고 있었다. 유향소는 조선시대 각 고을의 자치행정기구로 수령 주도의 관치행정 계통과는 대별된다. 유향소의 구성원을 鄕員이라 하며, 그 명부를 鄕案이라 하였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안 입록을 통해 향권 운영에 간여를 하였으며,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해 나갔다. 慶尙道善山府에서도 이러한 향안이 조선중기 이래 작성되었는데, 현재 善山鄕校에는 향안을 비롯하여 유향소 또는 鄕廳 운영과 관련된 자료가 전해지고 있다. 선산부에서 향안이 언제부터 작성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일찍이 많은 재지사족들이 거주했던 고을이었던 만큼, 사족의 勢가 강하였던 다른 고을처럼 17세기 이전에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본 자료는 선산향교의 향안 가운데에서도 17세기 전반기 향안 입록자 67명을 수록하고 있다. 앞부분이 탈락되어 있어 향안 작성 시기와 규모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성명 위에 작성된 직역 및 관직을 살펴 볼 때, 연도가 확인되는 1603년의 善山鄕案 보다는 시기적으로 후기에 작성된 듯하다. 그런데 입록자 중 崔晛은 持平이라는 관직명과 함께 기재되어 있다. 최현이 지평을 역임한 것은 1610년이고, 그해에 弘文館으로 옮겼다. 또 金寧의 경우 監察이라는 관직명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그가 감찰을 역임한 것은 1618년이다. 입록자의 관직명이나 生進試 합격 연도로 향안 작성 시기를 파악하기에는 부정확하다. 향안의 글씨체 등으로 보아 추록된 것 같지는 않기에 어느 시기에 일괄적으로 향안 입록자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듯하며, 관직명 기입에는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입록자 33명의 성명 아래에는 작은 글자로 ‘故’字를 표기해 두었다. 후대에 어떠한 목적으로 향안 입록자를 열람하는 가운데, 사망한 향원을 구별하기 위해 표기한 듯하다. 앞부분에 기재된 김령의 사망 연도가 1650년임을 감안할 때, ‘故’字 기입은 17세기 중반 무렵이고 본 향안의 작성 시기는 17세기 전반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향안 입록자 67명의 성씨는 金씨 23명, 李씨 13명, 朴씨 6명, 田,崔씨 각 4명, 鄭씨 3명, 康,孔,柳,文,黃씨 각 2명, 盧,尹,韓,許씨 각 1명 순이다. 『世宗實錄地理志』에서 확인되는 선산부의 土姓으로는 金,郭,文,林,沈,秦,白,趙,崔씨가 있다. 향안에 입록된 김씨의 대부분은 선산부의 토성으로 전통적으로 김씨의 족세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향안 입록자 지평최현이 간행한 선산부의 邑誌 『一善誌』에 따르면, 본부의 성씨 중에 오직 金씨만 심히 성대하다고 나타나 있다. 그 외 郭,文,沈,秦,趙씨는 현재 선산부에 없으며 林,崔씨는 그 勢가 매우 미미하고 白씨는 金씨와 더불어 吏族이 많다고 하였다. 김씨를 제외한 향안 입록자 거의가 타 고을에서 이주해온 사족가문 출신이라는 것이다. 조선중기 이전까지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率壻婚의 전통에 따라 혼인을 매개로 妻鄕 또는 外鄕이었던 선산부에 타 고을 출신의 사족이 정착하게 된 것이다. 또한 麗末鮮初의 정치적 갈등에 따른 卜居 등이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嶺南人才 半在一善’이라 일컬어질 만큼 선산부에는 일찍이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었으며, 이와 비례하여 타 지역 출신 재지사족도 혼인을 통해 활발하게 선산부에 정착하게 되었다.
한편, 『일선지』에는 타 지역 출신의 성씨로 田,黃,朴,鄭,盧,李,康,尹,裵,孔씨를 기재하고 있는데, 이는 『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확인된다. 『일선지』에 기재된 人物을 통해 향안 입록자의 본관을 살펴보면 信川康氏, 延安田氏, 德山黃氏, 安康盧氏, 碧珍李氏, 德水李氏, 密陽朴氏, 曲阜孔氏이고, 그 외에도 全州崔氏, 海州鄭氏 등의 가문 출신의 인사가 입록되어 있다. 이들 가문이 17세기 초반 유향소 운영과 향안 작성을 통해 선산부 향권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향안 말미에는 行首 金과 座首 文의 手決이 확인된다. 좌수는 유향소의 대표이나, 행수라는 鄕任은 구체적으로 그 성격이 파악되지 않는다.
입록자의 성명 위에 기재된 직역 및 관직 등을 살펴보면 幼學이 47명으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 외에 同知, 進士 각 3명, 僉知 2명, 監牧, 監役, 監察, 敎官, 郡守, 都事, 博士, 司果, 持平 각 1명이 확인된다. 입록자 중 유학 비중은 70%이다. 향안 입록자의 유학 비율은 17세기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재지사족의 중앙 진출이 활발했던 까닭에 50%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17세기부터는 유학 비율이 점차 증가하며, 17세기 중엽 이후로는 입록자 절대 다수가 유학으로 나타난다. 이는 조선후기 중앙정권의 閥閱化로 재지사족의 官路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는 17세기 중반 이후 나타난 향안의 권위 약화 현상과 직결된다. 본 향안은 이러한 현상의 중간 단계에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전반기 선산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향촌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주는 향안을 작성해 나갔다. 그들은 해당 고을의 명망 있는 사족 가문 출신으로 中人이나 庶孼, 그리고 사회적으로 성장한 新鄕들의 참여를 철저히 배제한 배타적 향안 운영을 통해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17세기 전반기에도 이러한 향안 작성의 전통은 지속된다. 본 향안도 17세기 전반기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사회 질서를 확립해 나가는 과정에서 작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