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尙道星州牧에 위치한 鳳岡書院이 훼철된 후, 배향자의 일족인 冶爐宋氏가 중심이 되어 강학의 전통을 계승하고자 1879년경 결성한 興學契의 序文으로, 이웃 仁同府 출신의 조선말기 문신 張錫龍이 작성
遊軒先生文集 四遊軒先生文集 卷之七 序 興學契序遊軒先生文集 卷之七 十
一 : 卷1 詩, 卷2 詩 / 二 : 卷3 詩, 卷4 疏 / 三 : 卷5 箚,敎書,表,箋,進香文,告由文, 卷6 書,致祭文,祭文,祝文 / 四 : 卷7 上樑文,序, 卷8 序,記 / 五 : 卷9 跋,箴,銘,雜著,禮狀,墓碑銘,碑銘,墓表,墓碣銘, 卷10 墓碣銘,陰記,墓誌銘 / 六 : 卷11 諡狀,行狀,遺事,附錄 / 七 : 附錄,年譜
[내용 및 특징]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구성원 간의 상호부조와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하는 각종 契 조직이 결성되어 왔었다. 특히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계 조직의 보급이 더욱 활성화되었으며, 다양한 형태로 운영되었다. 그 중 하나가 구성원 간의 학문 토론, 후진양성을 위해 결성된 學契이다. 조선시대 사족들은 학계를 통해 講學 규정을 제정하고, 필요한 제반 자금을 마련했던 것이다. 본 서문의 대상이 된 興學契 역시, 강학을 통해 구성원 간 결속력 강화를 도모하기 위해 결성된 계 조직이다.
본 흥학계는 19세기 후반 慶尙道星州牧에서 冶爐宋氏 일족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그런데 이 흥학계는 興宣大院君에 의해 훼철된 서원에 대한 복설 움직임과 맞물려서 진행되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1786년 성주목에는 야로송씨가 중심이 되어 성주에 寓居했던, 宋希奎(1494~1558)를 배향한 鳳岡書院가 설립되는데, 봉강서원도 이때 훼철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배향자의 후손이 중심이 된 지역 유림들은 봉강서원 터에 興孝堂를 짓고, 봉강서원에서의 강학 전통을 계승하는 흥학계를 결성하였으며, 인근 仁同府 출신의 조선말기 문신 張錫龍에게 이 서문을 부탁하게 된 것이다. 장석룡의 서문에는 봉강서원 배향자 송희규의 일대기와 흥학계 결성의 과정 및 契員들에 대한 바람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먼저 예로부터 賢人은 學問과 忠節을 함께 갖추고 있어서, 그들로 인해 世道가 행해지고 나라가 昇平할 수 있었다며 학문과 충절의 중요성을 강조해 놓았다. 그리고 그런 인물이 바로 자신의 外先祖인 宋希奎라 하였다. 송희규는 어려서부터 資稟이 뛰어났고 孝友가 있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이러한 體段을 갖추고 있었으니, 「讀小學」을 보면 가히 알 수가 있다 하였다. 「독소학」은 송희규의 문집 『倻溪集』에 수록되어 있는 七言絶句詩로 그가 7세 때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어 송희규는 장성하여 晦齋, 退溪, 沖齋 세 분 선생과 교유하며 학문을 수학했으며, 中宗, 仁宗, 明宗 세 임금을 강직한 충언으로 섬긴 분이라고 찬하였다. 하지만 불행히 柏府에 있을 때, 간신 무리들을 논박하다 간신배들이 품은 독기에 다섯 해 동안 고초를 당했다며 그의 일대기를 간략히 설명해 놓았다. 마지막의 고초는 명종 연간 司憲府의 執義로 있으며 乙巳士禍(1545)로 집권한 尹元衡 일파의 전횡을 탄핵하다, 오히려 이들에게 논박되어 5년간 귀양살이를 했던 사실을 설명한 것이다.
하지만 賦鵬한 그의 뜻은 후대에 복구되어 사림들에게 그 학문을 존숭 받게 되었으니, 그를 배향한 서원이 바로 봉강서원이다. 또한 孝友로 綽楔되었으며, 文肅이라는 시호를 받아 조정으로부터 충절을 인정받게 되었다고 한다. 송희규가 효행으로 旌閭된 것은 죽은 지 4년 뒤이며, 文肅이란 시호를 받은 것은 1871년이다. 그리고 그를 이어 조카인 宋師頤(1519~1592)도 배향되었으니 옛적 西山의 일에 비교해 손색이 없다 하였다. 송사이가 배향된 곳은 성주의 新淵書院으로, 성주의 鄕賢祠에는 송희규와 함께 배향되어 있다. 대를 이은 충절을 서산에서 죽은 伯夷와 叔齊에 비유한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陽九의 재앙으로 봉강서원이 훼철되었으니, 즉시 그 터에 후손들이 흥효당을 지어 선대를 羹墻과 같이 추모했다고 한다. 그리고 10년 뒤 지역의 사림들이 이 당에서 계를 맺으니 이것이 바로 흥학계인 것이다. 『야계집』에 수록된 李晩燾(1842~1910)의 「鳳岡書堂記」에 따르면 흥선대원군에 의한 봉강서원 훼철 이듬해인 己巳年에 흥효당이 설립되었다고 나타난다. 따라서 흥학계 결성 연도는 1879년이며, 장석룡의 서문도 이때 작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지역 유림의 공론으로 계가 결성되었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종전부터 봉강서원 운영을 주도했던 야로송씨 일족으로 여겨진다. 18세기 이후 대부분 서원의 성격이 조상을 顯揚하기 위한 門中書院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훼철 이후 서원 복설을 추진한 세력도 대부분 해당 서원 배향자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서문 말미에는 契案이 완성된 뒤 자신에게 서문 부탁을 받았다는 경위를 간략히 밝히고, 안에서는 道를 講明하고 밖에서는 몸을 다해 충성하는 것이 흥학계의 설립 의의이니, 선생의 학문과 충절을 계승하여 서로 권면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學契 결성의 추이와 19세기 후반 훼철된 서원 복설을 추진하는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사족들은 강학을 통한 학문 토론과 후진양성을 목적으로 각종 학계 조직을 결성하였었다. 이러한 학계 조직은 특히 一族 단위로 조직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학문 교류를 통해 구성원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사회적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운영되었다. 한편, 흥선대원군의 서원 훼철 이후 이런 학계 조직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재지사족들은 서원이 훼철되자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제사적 기능을 배제한 강학 활동을 지속하였다. 강학 활동을 명분으로 종전의 서원 조직을 유지하여 향후 서원 복설을 추진하는 바탕으로 활용한 것이다. 봉강서원 훼철 이후 강학공간을 대신할 흥효당을 설립하고, 10년 뒤 배향자의 학문 전통을 계승하는 흥학계를 결성한 것도 이러한 까닭에서 비롯된 것이다.
『遊軒集』, 張錫龍,
『倻溪集』, 宋希奎,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星州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星州郡, 1996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