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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1년 최현(崔晛) 김산향사당기(金山鄕射堂記)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WC.1621.4715-20110630.Y11411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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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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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교육/문화-문학/저술-기
작성주체 최현
작성지역 경상북도 김천시
작성시기 1621
형태사항 크기: 30.8 X 20.4
판본: 목판본
장정: 선장
수량: 18권 9책
판식: 半郭 : 15.5x21.0㎝, 四周雙邊, 有界, 10行21字, 註雙行, 上下內向四瓣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621년 최현(崔晛) 김산향사당기(金山鄕射堂記)
경상도(慶尙道)김산군(金山郡, 지금의 경상북도김천시)에 지어진 향사당(鄕射堂)의 기문(記文)이다. 조선시대 향사당은 자치행정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운영 공간 및 향약(鄕約)의 의례인 향음주례(鄕飮酒禮)와 독약회(讀約會)가 이루어지던 장소로 활용되었다. 이러한 김산군의 향사당은 조선초기부터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기에 1617년 위치를 옮겨 새롭게 건물을 지었으며, 1621년에는 최현(崔晛)이 본 기문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최현이 작성한 기문에는 향사당의 유래와 위치를 옮겨 향사당을 새로 짓게 된 연유 등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이광우

상세정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慶尙道金山郡의 鄕射堂을 새롭게 지은 후, 鄕飮禮와 讀約會 전통이 잘 계승되기를 바라며 1621崔晛이 작성한 記文
訒齋集 五訒齋先生文集 卷之十 記 金山鄕射堂記訒齋先生文集 卷之十 四十五
一 : 卷1 詩,敎文, 卷2 疏 / 二 : 卷3 疏, 卷4 疏,箚子 / 三 : 卷5 箚,啓,書啓,狀啓, 卷6 講議 / 四 : 卷7 講議,書, 卷8 書 / 五 : 卷9 書,雜著, 卷10 雜著,序,記 / 六 : 卷11 跋,箴,銘,箋,祝文,祭文, 卷12 祭文,墓碣,墓誌,行錄 / 七 : 卷13 行錄 / 別集 一 : 卷1 關西錄, 卷2 書啓,狀啓,拾遺 / 別集 二 : 年譜
[내용 및 특징]
鄕射堂은 원래 해당 고을의 인사들이 독서하고 활을 쏘며, 會飮하던 장소였다. 그러나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 중심의 留鄕所 운영과 鄕約 보급이 활발해짐으로써, 향사당 운영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조선시대 지방자치행정 기구인 유향소 또는 鄕廳의 집무처로 운영되기도 했으며, 향약의 의례인 鄕飮酒禮 및 讀約會가 열리기도 하였다. 조선시대 慶尙道金山郡에도 일찍이 이러한 향사당이 설립되어 지역 재지사족들의 鄕權 운영처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본 「金山鄕射堂記」는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향사당을 새롭게 짓고 天啓元年(1621) 3월에 작성한 記文이다. 기문의 작성자는 崔晛으로 인근 善山府 출신의 문신이다. 光海君 연간 고향에 寓居하던 도중 김산군 士林들의 촉탁을 받아 기문을 작성하였다. 기문에는 향사당의 유래와 의의, 김산군 향사당 중수 과정, 지역 사림들에 대한 바람 등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기문에서는 먼저 각 고을마다 향사당이 있으니 이는 黨庠州序의 제도라며 그 연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서 향사당은 지금의 學校, 즉 鄕校와 표리관계를 이룬다 하였다. 학교에서는 講學을 통해 선비를 양성하며, 향사당에서는 높은 이를 높게 대하고 어른을 어른으로 모시는 방법을 가르치니, 이로써 인륜이 밝아진다는 것이다. 지방에서의 교육은 향교가 맡고, 교화는 향사당이 책임진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향사당은 閭閻 사이에 있고 官府 옆에 있어, 그 任을 맡은 자는 항상 관청에 분주하게 다니며 각종 文書를 奉行하느라 매우 고되고 지위 또한 낮다고 하였다. 거기다 吏胥의 雜沓함과 저잣거리의 시끄러움이 있기에 향사당을 운영하는데 있어 많은 병폐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여기서 향사당의 任은 유향소 또는 향청 운영을 주도하는 鄕任을 뜻한다. 향사당은 대부분 고을의 邑治 내에 있었기에 향임들은 관부의 간섭을 피할 수가 없었다. 관부는 유향소를 고을의 貳衙로 생각하고 향임에게 수령을 보좌하는 각종 업무를 부여하려 했기에 향임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향사당이 관부와 가까이 위치한 것을 그리 좋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저잣거리의 시끄러움도 은유자적한 명승지에서 講學과 修身을 추구하는 사족들이 꺼려하는 바였다.
이어서는 김산군에서 향사당이 새롭게 지어지고 기문이 작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먼저 金陵郡(金山郡의 別稱)은 湖西嶺南이 만나는 곳에 위치해 있고, 산천이 美麗한데다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인근 尙州, 善山과 같은 고을에 견줄 만하다며 찬하였다. 그런 김산군의 향사당은 원래 관부 건물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쑥대밭이 되어 십 수년간 새로 짓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 萬曆丁巳(1617)에 鄕父老들이 의논하여 성 남쪽의 武學堂 옛 터에 향사당을 새로 짓게 되었는데, 장소를 옮긴 것은 예전의 향사당 자리를 꺼려했기 때문이라 하였다. 새로 지어진 향사당에 대하여 서쪽으로 黃嶽山과 여러 산들이 마주 서있고 온갖 하천들이 다투어 흐르며 남쪽의 鳶華池에는 연꽃이 만개해 있으니, 향사당 계단을 올라 옷을 가지런히 하고 있으면 매우 상쾌한 기분이 들어 예전처럼 城市의 시끄러움을 느낄 수 없다고 최현은 감탄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鄕父老 뿐만 아니라 遠近에서 방문한 모든 인사들이 감탄하는 바이니, 우리 영남 고을 중 가장 뛰어난 장소에 자리 잡은 향사당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병화로 잿더미가 된 향사당을 짓는데 의견을 주도하고 監董했던 座首 鄭維翰과 이를 성취한 柳仲龍의 노고를 높이 평가하였다. 류중룡金山郡守로 재임한 기간은 1612년에서 1617년까지로 재임 마지막 해에 향사당이 완성된 것이다. 향사당은 최초 正堂 9칸을 짓고, 다음으로 부속건물 9칸을 지었으며 未備된 건물은 차후 시의에 맞추어 지을 것이라 하였다.
기문 말미에는 향사당 설립의 의의와 바람이 언급되어 있다. 향사당에서 이루어지는 鄕射의 법은 옛날의 도의로 반드시 복구해야 되는 것이기에, “禮는 폐해졌으나 羊은 남아 있으니, 夫子가 아끼는 바와 같다(禮廢羊存 夫子猶有所愛焉)”라는 『論語』의 고사를 인용하여 향사당의 명분과 의의를 잊지 말 것을 당부한 것이다. 아울러 鄕飮酒禮와 讀法과 같은 옛적 예법도 다시 일으키기를 당부하며, 기문을 마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임진왜란 이후 재지사족들의 향촌 복구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재지사족들은 폐허가 된 향촌을 복구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나갈 각종 기반도 새롭게 정비해 나갔다. 여기에는 전란으로 소실된 鄕射堂 복구도 포함된다. 향사당은 재지사족 중심의 자치행정기구인 유향소 또는 향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서의 활동을 매개로 사족들은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해 나갔었다. 경상도김산군에서도 1617년 전란으로 소실된 향사당을 새롭게 설립함으로써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해 나갈 기반을 복구해 나갔던 것이다.
『訒齋集』, 崔晛,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金泉市誌』, 金泉文化院, 金泉文化院, 1989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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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621년 최현(崔晛) 김산향사당기(金山鄕射堂記)

金山鄕射堂記
列邑之有鄕射即古黨庠州序之制而今之學校相爲
表裏焉講學養士必於學校而尊尊老老必於鄕黨皆
所以明人倫也其可以輕視之乎然而是堂也必在閭
閻之間官府之側秪爲任事者趨蹌公庭奉行文書之
所務煩而任苦地卑而處閙吏胥之雜沓而鷄犬之喧
啾焉豈不病哉金陵爲郡居大逵之衝山川之美
麗人物之殷富直與相埒焉鄕射之堂舊在郡齋

之西逮經夷禍沒於蓬蒿者數十年矣邑人欲新之而
未遑焉萬曆丁巳鄕父老會議興廢嫌其庭基之僻陋
移卜於城南武學堂古基地得其新而改觀焉制因其
舊而增損焉堂之西有黃嶽山千峰拱立百泉爭流朝
雲暮靄呈態於欄楯之上堂之南有鳶華池百頃淸漣
萬朶芙蓉月波風香泛灔乎几席之間眞勝槩也躡階
而登整衣而坐忽覺爽氣之生襟淸趣之滿眼不知在
城市喧煩之中也於是一鄕父老曁遠近來觀者莫不
徘徊歎賞之不足咸曰美哉堂乎非但金陵一邑之勝
觀吾中鄕射之堂無有與此甲乙者可謂善擇其地

矣經始乎昔年灰燼乎兵火重新乎此日者無非有數
焉主是議而監董者座首鄭公維翰也助是役而成就
者郡宰柳俟仲龍也先建正堂九間次建西序九間所
未備者以待時也噫余客也亦嘗升堂而飮矣抑因是
而有所感矣鄕射之堂旣新其舊制矣鄕射之法獨不
可復其古道邪禮廢羊存夫子猶有所愛焉則矧乎斯
堂名與制幷存而鄕人之繼作者無窮安知後日之會
是堂其不顧名思義而興飮射讀法之古禮耶旣語鄕
人退而記之以爲登是堂者勉焉天啓元年暮春烏洛
晩逸完山崔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