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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0년 황섬(黃暹) 퇴계선생향약조발(退溪先生鄕約條跋)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WC.1610.4721-20110630.Y11416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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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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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황섬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작성시기 1610
형태사항 크기: 30 X 19.5
판본: 목판본
장정: 선장
수량: 5권 3책
판식: 半郭 : 14.8x19.0㎝, 四周雙邊, 有界, 10行20字, 內向二葉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2800
현소장처: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2800

안내정보

1610년 황섬(黃暹) 퇴계선생향약조발(退溪先生鄕約條跋)
조선중기 이후 양반들은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반영된 향약을 제정하고 실시함으로써 효과적인 향촌 지배를 확립하려 했다. 영남 지역에서는 1556퇴계(退溪)예안(禮安)에서 향약을 제정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해 다른 고을로 확산되어 갔다. 지금의 영주시(榮州市)에 속한 인근의 풍기(豊基)에서는 퇴계의 학통을 계승한 황섬(黃暹)황엽(黃曄) 주도로 향약 보급이 시도되었다. 본 자료는 황엽황섬에게 퇴계의 향약 실시를 의논하는 가운데, 1610황섬이 작성한 발문으로 풍기에서의 향약 보급 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이광우

상세정보

慶尙道豊基郡에서 退溪鄕約을 모방하여 제정한 향약의 跋文으로, 향약 제정을 주도했던 黃曄의 부탁을 받아 1610黃暹이 작성
息庵先生文集 人息庵先生文集 卷之四 跋 退溪先生鄕約條跋息庵先生文集 卷之四 十二
天 : 卷1 詩 / 地 : 卷2 詩, 卷3 批答,疏 / 人 : 卷4 書,雜著,序,記,跋,銘贊,箋文,冊文,祝文,祭文,行狀, 卷5 行狀
[내용 및 특징]
16세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鄕約 제정과 운영을 통해, 향촌사회의 지배질서 명분을 확립해 나갔다. 嶺南 지역에서의 향약은 1556退溪에 의해 「鄕立約條」가 제정됨으로써 그의 門人들에 의해 각 고을에 보급되었다. 「鄕立約條」는 제정 인물과 시행 지역의 이름을 따서 禮安鄕約 또는 退溪鄕約이라 불리기도 했다. 경상도 북부에 위치한 豊基郡(지금의 慶尙北道榮州市)에서는 17세기 초반 퇴계향약이 보급된 흔적이 나타난다. 본 자료는 1610풍기에서 퇴계향약이 보급될 때, 黃暹이 작성한 발문이다.
황섬은 중앙관료로 활동하다 1608풍기에 정착하였다. 鄭琢의 문인이었으며, 당대 풍기지역의 퇴계학맥을 대표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작성한 「退溪先生鄕約條跋」에는 풍기에서 퇴계향약이 보급되는 경위가 간략하게 나타나 있다. 발문에 따르면 먼저 풍기는 원래 군자의 고장이고 풍속이 아름다운 곳이었으나, 임진왜란으로 禮義를 다스릴 겨를이 없어 同流合汚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탄하고 있다. 풍기의 향약 보급의 사회적 배경이 전란 후 재지사족들에 의한 향촌복구 과정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때 풍기의 재지사족인 黃曄이 자신을 찾아와 퇴계의 「鄕立約條」를 보여주며 이것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이루는 指南이 된다고 말하면서, 지금 留鄕所의 鄕憲을 맡은 위치가 되어 우리 고을에 옮겨와 실시하려고 했으나 아직 이루지 못하고 다만 壁上에 이를 걸어 여러 인사에게 보여주며 동조를 얻고 있는 과정이라 말했다고 한다. 황엽은 당시 풍기 유향소의 座首를 역임하고 있었다. 향약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一鄕 사림의 동조가 반드시 필요하였다. 그런 가운데 중앙관료를 역임하다 풍기에 정착한 황섬을 찾아와 향약 시행을 개진하게 된 것이다.
황엽으로부터 퇴계향약을 받은 황섬은 2~3회 읽어 본 뒤, 퇴계향약은 옛적 李賢輔(1467~1555)가 이루지 못한 것을 선생이 이어 받아 제정한 것이니, 이것이야 말로 孝悌忠信의 근본이며 人事의 節文으로 五輪과 六行이 모두 겸비되어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퇴계선생은 옛날 우리 고을의 풍속을 교화한 깊은 인연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실재 퇴계豊基郡守를 역임하면서, 書院 교육을 장려하는 등 풍기지역 교화에 큰 영향력을 끼쳤던 인물이다. 퇴계향약을 읽어 본 황섬은 곧 황엽의 청대로 풍기에서의 퇴계향약 실시를 동조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엽황섬에게 跋文을 청하여 본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발문 마지막에는 청을 받아 발문을 작성하는 동안 좌수가 교체되어, 새 좌수와 향약 시행에 대하여 의논하는 내용을 수록하였다. 황섬황엽이 생각한 바를 새 좌수에게 보여주니, 새 좌수가 그 뜻을 같이 했다고 한다. 이에 새 좌수가 풍기 출신으로 중앙에서 主簿를 역임한 黃彦柱가 퇴계향약 시행의 의의를 찬했다며 황섬에게 말하였는데, 이를 수록함으로써 발문을 마치고 있다.
[자료적 가치]
퇴계향약의 보급과 시행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향촌교화와 효과적인 향촌지배질서 확립을 위해 재지사족들에 의한 향약 시행이 확산되어 갔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향약이 향촌복구와 병행되어 제정되어 갔는데, 영남 지역에서는 퇴계향약이 퇴계의 문인들의 주도 하에 보급되었다. 풍기에서도 퇴계학맥을 계승한 黃暹에 의해 임진왜란 이후 향촌복구와 병행하여 퇴계향약이 보급되었다. 하지만 향약이 실재 풍기에서 퇴계향약이 제대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확인이 되지 않는다. 다만 퇴계가 제정한 향약도 예안 사림의 公論을 일치시키지 못해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풍기에서의 향약 시행도 쉽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息庵先生文集』, 黃暹,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民族文化論叢』7, 鄭震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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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610년 황섬(黃暹) 퇴계선생향약조발(退溪先生鄕約條跋)
退溪先生鄕約條跋
吾鄕君子鄕也風俗嘗美矣人亡教弛淆漓偸薄仍
之以國亂兵興禮義之治有不暇及同流合汚識者
之傷心久矣黃公曄好古人也爲鄕座首慨然於此
一日袖一紙書來示予曰昔退溪先生爲其鄕立此
約條其於化民成俗眞指南也留鄕所掌鄕憲今欲
以此約移立於吾鄕而如吾歇後素無風力雖三令
五申盛氣長嗟柰洪鍾寸筵何試欲以先生約條及
序文鋟之梓揭壁上以表準於一鄕或者可乎余感
其言受而讀之再三言曰昔先正聾巖相公有志未
就吾先生成之者也冠以序條列于下綱擧目張指
約包廣槩以孝悌忠信爲根本而天理之節文人事
之懿則五倫六行皆備焉善推而行之則豈止於一
鄕井之治哉吾子新執鄕綱不以趨走邑今爲先首
擧先生良法美意欲體而行之試之一封之內昔我
先生曾父母於此邦此邦之人沐浴於其化中者多
今使之受其約條則澤留而誠服耳熟而心悅一動
其機感激於衷一叩其端應捷於響怳以身承謦欬
於凾丈之下孰不相率而入於約條之中哉道邇而
事易子必勉之黃公曰固吾志也但如吾賤末敢以
先生化一鄕者遽欲移之吾鄕夫地異則事新事新
則人駭人誰信之願得鄕先生一言之跋予固辭以
不敢黃公再强之予重其意不敢違荏苒間黃公去
任今座首代之其意則同予錄之以示今座首使之
語前座首今座首曰主簿彥柱朝紳也屈於鄕樂
於爲善好成人之美萬曆庚戌仲夏昌原黃暹謹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