醴泉郡高坪洞에서 실시되던 동약으로, 임진왜란 후 중단되었다가 1601년 이곳에 낙향한 鄭琢이 시의에 맞추어 俗例를 참고해 새롭게 約條를 제정하고 그 서문을 작성
藥圃先生文集藥圃先生文集 卷之三 序 高坪洞契更定約文序藥圃先生文集 卷之三 三十六
1책 : 卷1 詩,書 / 2책 : 卷2 書,疏,箚, 卷3 啓,獻議,祭文,記,序,跋 / 3책 : 卷4 墓誌,雜著, 卷5 避難行錄下 / 4책 : 卷6 避難行錄上,附錄, 卷7 附錄
[내용 및 특징]
16세기 이후 사림세력은 鄕約을 향촌사회에 보급함으로써 향촌교화와 더불어 하층민에 대한 지배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향약은 기존에 실시되고 있던 留鄕所의 鄕規나 자연촌을 단위로 실시되었던 洞契를 비롯한 각종 자치적 조직의 규정과 접목되어 갔다. 향규와 동계 등에도 朱子增損呂氏鄕約에 언급된 綱領과 조직, 講信禮 및 善籍과 惡籍 작성 등의 전통이 반영 된 것이다. 특히 동계는 향약 접목 이후 일반적으로 洞約이라 불렸는데, 사족들은 동약을 바탕으로 지역 내 일족 간 결속력을 다지고 거주지 인근의 하층민을 통제해 나갔다. 이러한 동약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일련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바로 上下合契의 출현이다.
7년 간의 전란으로 향촌사회는 크게 피폐해졌다. 전란 후 사족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자신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는 향촌사회의 복구였다. 그런 가운데 사족만으로 이루어진 종전의 동약에 하층민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게 된다. 하층민 가운데 有司를 뽑아 동민 전체의 참여를 공식화하였다. 전란 후 향촌복구에 있어 하층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상하합계가 형성된 것이다. 1601년 醴泉郡高坪洞에서 제정되었던 洞契의 約文 역시, 임진왜란 이후 향촌복구와 함께 새롭게 마련되면서 하층민이 참여하는 상하합계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본 자료는 1601년 鄭琢에 의해 새롭게 마련된 동계의 約文으로 서문과 洞契約條, 그리고 書約條跋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서문에는 1601년 鄭琢에 의해 고평동계의 약조가 제정되는 과정을 확인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1601년 봄 정탁은 벼슬을 그만두고 外鄕이자 출생지인 예천의 高坪坊에 우거하였는데, 이때 洞人 孫達이 거처인 望湖齋를 찾아와 자신에게 洞約을 새롭게 제정해 달라고 청했다고 한다. 손달의 청에 따르면, 고평동에서는 일찍이 李仲樑에 의해 동약이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정탁은 감당할 일이 못된다며 처음에 거절하였으나 끝내 승낙하였고, 우선 이중량이 제정한 동약의 열람을 청했다. 하지만 손달은 임진왜란으로 이중량의 동약이 안타깝게 손실되었다고 하였고, 다만 呂氏鄕約의 舊條를 대강으로 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그래서 정탁은 察訪 宋德久의 집에 보관되어 있는 여씨향약을 보고 시의에 따라 전통적인 俗例를 竄入하여, 이른바 新舊條를 함께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동리의 여러 인사들에게 열람케 하였더니, 모두 이중량의 못 다한 뜻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교화가 이루어지게 될 것이니 참으로 다행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승낙을 받고 동약의 正案을 만들게 되었는데, 미진한 부분은 후일 보충하기로 했다. 서문 마지막에는 모두가 동약을 잘 준수하여 옛적의 美風이 융성해지기를 원하는 바람이 언급되어 있다. 서문의 작성일은 1601년 3월 11일이다.
서문에서 확인되듯이 정탁이 동약을 새롭게 제정하기 이전에 여씨향약을 바탕으로 만든 이중량의 동약이 있었음이 나타난다. 정탁은 이중량과 마찬가지로 여씨향약을 대강으로 하고, 여기에다 시의에 따라 속례를 참작하여 동약을 제정했던 것이다. 이때 제정된 동약의 약조는 洞契約條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동계약조는 크게 勸勉條 11조와 禁制條 18조로 구성되어 있다.
동계약조는 일반적인 향약처럼 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의 4대강령을 바탕으로 세부조항을 나열해 놓지 않았다. 시의에 따른 속례에 맞추어 권면조와 금제조로 나누어 구성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향약에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우선 근면조의 ‘盡忠事君’, ‘忘身殉國’, ‘倡義復讐’, ‘先公後私’, ‘勇於爲義’는 임진왜란 직후 애국정신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이는 전시정국에 깊이 참여했던 정탁의 의도가 깊이 반영된 것으로, 다른 향약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적인 내용이다. 한편, 금제조의 ‘妄議朝廷是非’, ‘輕論州縣得失’, ‘違犯官令’의 규정은 임진왜란 이전 鄕規에서도 유사한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자치적인 동약을 시행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관권과의 원활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했다. 즉 위와 같은 조항을 마련함으로써 미연에 관권과의 마찰을 피하려 했던 것이다. 그 외 권면조의 ‘愼納賦稅’와 금제조의 ‘擅伐禁林’, ‘侵占田疆’, ‘攘奪人財’ 등은 전란 이후 각종 국가규제의 문란과 혼란을 차단하고, 원활한 향촌복구를 이루기 위해 제정해 놓은 규정이다.
권면조와 금제조의 규정 다음에는 약조 위반시 처벌 조항이 나타나 있다. 먼저 일반적인 향약과 마찬가지로 講會하는 날에 약임이 약조를 읽으며 약원들을 申明하고 장부를 만들어 약조 위반자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 경중에 따라 논벌하고, 죄질이 무거운 자는 黜約했다고 한다. 이어서 下契庶人, 즉 동약에 참여한 하층민에 대한 처벌 규정이 나열되어 있다. 이들에 대한 규찰은 當隊領首가 맡는다고 나타나 있다. 주목할 점은 當隊와 領首가 전통적인 농경사회에서 유래되어 오던 두레의 용어라는 것이다. 두레는 일정한 인원으로 각 隊를 만들었고, 그 隊의 長을 領首를 비롯한 다양한 용어로 지칭하였다. 즉 고평동계라는 동약이 하층민에 의해 조직된 두레와 결부되어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계 구성원으로 규정 위반자에 대해서는 酒罰을 내리는데 죄질이 무거우면 下契有司가 上契有司에게 알려 처벌했다고 하며, 만약 매우 큰 죄이면 관청에 알렸다고 한다. 상계를 통해 하계가 통제되는 일면이 나타난다. 이상과 같이 하계에 대한 처벌 규정은 전란 직후 확산되기 시작한 상하합계의 성격을 확인 할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書約條後는 俗例를 반영한 동약의 의의를 한 번 더 강조한 글이다. 고평동계의 약문은 속례를 많이 참작하였기에 전통적인 朱子增損呂氏鄕約의 체제와는 규정과 운영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고, 이에 洞里의 한 사람이 이의를 제기하자 속례를 참작한 연유를 설명해 놓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동리의 한 사람이 정탁에게 “紫陽朱子가 참정한 藍田呂氏鄕約은 綱目이 크게 세밀하고 찬연히 갖추어져 있어 一言一字라도 마땅히 增損하지 못할 것인데, 公은 이를 하나같이 따르지 않고 이같이 輕重에 따라 取舍함이 있는가? 짐짓 그 대강만을 들어 말한 즉, 여씨구약의 德業全條가 빠지고 禮俗儀節은 과반이 누락되어 있으며, 約會의 절목은 싣지 않고 간혹 俗例를 많이 모아 실고 있으며, 約正을 有司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매달 모여 교체하는 것을 봄과 가을 두 번으로 고쳐 정하니 이는 진실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에 정탁은 “君의 말이 옳으니 내 어찌 비난하리오. 다만 옛날과 지금의 다름이 마땅하고 풍속이 오히려 서로 다르며, 쉽고 어려움의 殊勢가 갈수록 더함이 오직 이것뿐이 아니다. 나라 안팎으로 새로이 큰 난리를 겪어 인심이 붕괴하고 풍속이 壞敗한 이때에 하나같이 古式만 따라 그와 같이 이룰 것을 책망한 즉, 막혀 통하기 어려워 壓苦怠倦케 되어 오래토록 유지하지 못할 우려가 있을 수 있다. 이에 먼저 풍속에 익숙한 바를 들어 백성들에게 편리하게 정하고 遵率하기에 이롭게 하여 永久히 교체하지 않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진실로 先賢遺意를 敬奉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는 古來의 俗例를 따라 동약을 제정하게 된 연유를 설명해 놓은 것이다. 약문에 여씨향약이 제대로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고 했는데, 정탁의 약문에는 특히 德業相勸의 조항과 過失相規의 절반 정도가 빠져 있다고 했다. 각종 의례 역시 크게 생략되고 약임의 명칭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정탁은 여씨향약을 일방적으로 따르기보다 俗例를 크게 반영한 것은 전란으로 인해 인심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씨향약의 제 규정을 지킬 것만 주장하면 오히려 민들의 고통이 더해질 것이라는 우려가 있기 때문에 따르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 하였다. 원활한 향촌복구를 위해서는 우리의 전통적인 것과의 습합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는 곧 실질적인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의 복구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자료적 가치]
임진왜란 직후의 동약 제정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약 보급 이후 재지사족들은 거주지와 인근의 동리를 단위로 동약을 시행해 나갔다. 이들은 동약을 바탕으로 지역 내 일족 간 결속력을 다지고 거주지 인근 하층민의 통제를 도모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동약은 중지되고 향촌은 크게 피폐해지게 되었다. 이에 사족들은 그들의 사회,경제적 기반이 되는 향촌사회의 원활한 복구를 위하여 새로운 성격의 동약을 제정했는데 이른바 上下合契의 결성이다. 동리의 하층민들은 古來로 두레와 같은 상부상조 성격의 공동조직을 운영해 왔다. 사족들은 향촌의 원활한 복구를 위해 이러한 하층민의 조직을 흡수하여, 이들을 동약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하층민을 공식적으로 동약에 포함시키는 상하합계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1601년 정탁에 의해 새롭게 마련된 고평동계의 약문도 종전과는 달리 하층민에 의해 이루어진 下契가 어울려진 새로운 동약에 속한다.
『藥圃先生文集』, 鄭琢,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중앙사론』5, 朴京夏,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1987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