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 慶尙道漆谷府에 거주하던 李聃命이 향약 중수를 의논하기 위해 발급한 通文
靜齋集 秋靜齋先生文集 卷之五 雜著 重修鄕約通文靜齋先生文集 卷之五 十五
春 : 卷1 詩,疏, 卷2 疏 / 夏 : 卷3 疏,箚, 卷4 啓辭,緘辭,諭書,狀,書 / 秋 : 卷5 雜著,祝文,祭文, 卷6 祭文,墓誌,墓碣陰記,行狀 / 冬 : 卷7 附錄, 卷8 附錄
[내용 및 특징]
17세기 초반 이래 慶尙道漆谷府의 上枝洞 일대에서는 洞里 단위의 향약이 시행되고 있었다. 상지동은 廣州李氏의 세거지로 일족 단위의 族契가 시행되고 있었으며, 이와는 별도로 上枝坊 일대에 거주하는 재지사족 주도의 향약 시행도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 출신의 대표적인 사족 가문인 광주이씨 인사들이 향약 시행을 주도하였는데, 본 통문을 작성한 李聃命 역시 광주이씨 출신이다. 본 통문은 십 수년 동안 중단 중이던 향약을 중수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이때 중수하려던 향약의 구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파악 할 수 없으나, 이담명 선대부터 지역에서 시행되어 오던 이상의 족계나 향약일 것으로 여겨진다.
통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향약의 유래가 오래되었으며, 一世에 같이 태어나서 一里에서 함께 거주하는데 평상시에는 德業을 서로 勉勵하고 유사시에는 재력을 내어 서로 救助하는 것에 있어 향약만큼 좋은 것이 없기에, 衆心이 하나로 모아지고 풍속의 교화가 돈독해 질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 십 수년 전 구성원 간의 異論이 발생하여 향약이 중간에 폐지되었고, 이로부터 鄕里의 순후한 풍속이 유실되었으며, 喪葬과 같은 큰 일이 있을 때 도와주는 規模가 없어져버려 識者들이 극히 한심하게 여기고 있는 상황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의 향약이 덕업의 권장 이외에도 물자를 모아 喪葬時에 부조하는 상부상조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담명이 여러 僚友와 의논하고 長老에게 물어 다시 옛 뜻을 계승하여 契를 중수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수 초창기에 마땅히 合物이 필요하기에 士夫는 租 2石, 中人은 租 1石 규모로 定式을 삼았다고 했다. 사족뿐만 아니라 중인도 참여했던 향약임을 알 수 있다. 그 외 시세와 물정에 맞추어 節目의 潤色과 增感이 필요한데, 이는 齊會하여 熟議해야 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문득 생각하니 지금의 僉尊은 옛적 계의 先生이 아니면 그 자제들이니 불가불 향약을 중수하여야 되기에, 오는 11월 19일 이른 아침 뒤에 古亭 李達子의 집에 모여 어떻게 향약을 처리할 것인지 의논하자고 알리며 통문을 마치고 있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후반 향약 시행의 추이와 칠곡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거주지를 중심으로 동리 단위의 향약을 시행해 나감으로써,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해 나갔다. 또한 향약을 매개로 유사시 상부상조 함으로써 구성원 간의 결속력 강화를 도모하였는데, 이담명이 중수를 시도한 향약 역시 이러한 경향의 향약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담명이 거주하던 경상도칠곡부상지동에는 광주이씨 일족이 세거했던 지역이다. 광주이씨 일족은 17세기 초반 이래 족계 또는 동약 등의 향약을 꾸준히 향리에서 시행해 나가며,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해 나갔다. 앞서 李潤宇, 李道長, 李元禎 등이 향약을 시행하였으며, 이담명도 선대의 뜻을 계승하여 향약 중수를 주도했던 것이다.
『靜齋集』, 李聃命,
『漆谷誌』,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漆谷郡誌』, 漆谷郡, 漆谷郡, 1994
『朝鮮時代 廣州李氏의 삶과 學文』, 韓國歷史文化硏究院, 서울歷史博物館, 韓國歷史文化硏究院, 서울歷史博物館, 2004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