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 上枝洞(現 慶尙北道漆谷郡枝川面新里)에서 실시되고 있던 향약을 새롭게 정비하면서 마련된 上枝洞契의 契案 序文으로, 상지동 출신의 문신인 李元禎이 작성
歸巖先生文集 射歸巖先生文集 卷之六 序 上枝洞契案序歸巖先生文集 卷之六 九
一 : 卷1 詩, 卷2 疏 / 二 : 卷3 疏, 卷4 箚,啓辭,供辭,緘辭 / 三 : 卷5 獻議,諭書,箋,呈文,書,雜著, 卷6 序,記,跋 / 四 : 卷7 祝文,祭文, 卷8 祭文,碑銘,墓誌銘,陰記 / 五 : 卷9 行狀, 卷10 行狀 / 六 : 卷11 附錄, 卷12 附錄
[내용 및 특징]
지금의 慶尙北道漆谷郡枝川面新里에는 조선전기 이래 廣州李氏가 세거해 왔으며, 17세기에는 광주이씨 일족 주도의 族契가 시행되고 있었다. 신리 일대는 조선시대까지 上枝洞이었기에, 이 향약은 지명을 빌어 上枝鄕約이라 불려졌다. 상지동은 1640년 漆谷都護府가 설치된 이후 칠곡로 편입되기 이전까지 星州牧의 영현이었다. 상지향약 유래에 대해서는 본 서문을 작성한 李元禎의 부친 李道長이 작성한 「上枝鄕約序」를 통해 간단히 살펴 볼 수 있다. 이 글은 이도장의 문집인 『洛村集』에 수록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상지향약은 최초 1602년에 결성되었으며, 1638년에 중수된 적이 있었다. 이시기 광주이씨들은 상지동 일대에 거주하는 일족끼리 향약 결성을 통해 상호 결속력을 굳건히 하며, 향촌 내 지위를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上枝洞契案序」는 17세기 후반 시행되지 않고 있던 舊來의 상지향약을 새롭게 정비하기 위해 결성되었던 上枝洞契의 契案 서문이다. 서문에는 상지동계가 결성되는 경위와 계원들에 대한 바람이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다.
먼저 서문에서는 상지동은 우리 이씨가 세거해온 곳으로 이씨가 아닌 인물들도 대부분 이씨의 친족이라고 하며, 상지동이 광주이씨 동성촌임을 확인해 주고 있다. 그리고 상지동에서 향약이 시행되었으며, 1738년에는 案이 제작되었으니 당시 先子가 그 서문을 작성했다고 하였다. 先子는 이원정의 부친 이도장으로 서문은 앞서 언급한 「상지향약서」이다. 향약이 시행됨으로 士風이 진작되고 民俗이 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 문중이 운이 다하여 여러 장로들이 사망하는 바람에 德業을 서로 권하고, 過失을 서로 규제하던 향약이 폐지되기에 이르렀으며, 지금 상지동의 上下洞民 가운데 案에 입록되었던 인물이 남아 있지 않아 동리를 통제할 수 있는 구심점이 없게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이에 향약 외에 별도로 洞契를 결성하여 향약의 申明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전과 같이 명단을 작성하며, 呂氏鄕約을 節目으로 삼고 舊案을 참작해서 상지동계를 결성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상지동계를 통하여 卑賤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下人이 上人을 능멸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 민들을 교화시키고 彛倫를 바로 잡는데 밑거름이 될 것을 바라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은 契外의 인사이나 동리의 諸賢들이 부탁을 해서 이글을 작성하게 되었음을 밝히며 서문을 마치고 있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향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재지사족들은 거주지를 중심으로 洞契 또는 族契를 시행해 나갔는데, 상지동계 역시 이러한 성격의 향약이다. 실시 지역은 상지동이라는 세거지이며, 참여 인원은 광주이씨 일족이다. 조선시대 재지사족들은 이러한 향약 시행을 통해 구성원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그 윤리규범을 바탕으로 향촌지배질서를 정립해 나갔던 것이다.
『洛村集』, 李道長,
『歸巖集』, 李元禎,
『京山誌』,
『漆谷誌』,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漆谷郡誌』, 漆谷郡, 漆谷郡, 1994
『朝鮮時代 廣州李氏의 삶과 學文』, 韓國歷史文化硏究院, 서울歷史博物館, 韓國歷史文化硏究院, 서울歷史博物館, 2004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