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5년경 慶尙道星州牧上枝坊 일대에서 시행되고 있던 鄕約의 전말을 기록한 것으로, 이 지역 출신의 유학자 李道長이 작성
洛村集 單洛村文集 卷之二 記 鄕約記洛村集 卷二 三
卷1 詩,疏,戔,呈文,序, 卷2 記,祝文,祭文,墓誌,碑陰,行狀, 卷3 附錄
[내용 및 특징]
16세기 중엽 이래 향촌사회에 향약 보급이 활발해지면서, 종전에 시행되어 오던 鄕規를 비롯한 제 조직에 향약 규정이 접목되어 갔다. 재지사족들은 이러한 향약을 매개로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정립해 나갔던 것이다. 향약은 시행 범위와 대상에 따라 운영에 있어 일정한 차이가 나타난다. 1635년경 李道長가 작성한 「鄕約記」의 대상이 된 향약은 그 중에서도, 몇 개의 동리 단위로 시행되던 洞約으로 생각된다.
「향약기」는 이도장이 거주하던 동리에서 시행되던 향약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자료의 부족으로 당시 이도장이 참여한 향약의 명확한 내용과 시기 등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향약기」를 통하여 시행 지역과 향약의 성격 등을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 정도이다.
「향약기」의 서두에는 本坊의 향약은 天啓乙丑(1625) 봄에 결성된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일컫고 있는 本坊은 이도장이 거주하고 있던 慶尙道星州牧의 上枝坊 일대로 생각된다. 이도장의 廣州李氏 가문은 李克堅이 星州牧使로 부임한 이래 줄곧 上枝洞 일대에 거주하였다. 상지동은 1640년 漆谷都護府가 설치됨에 따라 이후 칠곡으로 편입되었으며, 지금의 慶尙北道漆谷郡枝川面이다. 즉 향약이 시행될 무렵까지 상지방은 경상도성주목 소속이었던 것이다. 또한 17세기 성주목의 읍지인 『京山誌』와 칠곡도호부의 읍지 『漆谷誌』에서는 소속 坊里로 상지방이 확인되며, 상지방에는 수 개의 동리가 있음이 나타나, 「향약기」의 대상지역을 성주목 소속이었던 상지방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
이때 향약은 藍田鄕約을 規模로 삼았다고 나타나 있다. 北宋代 呂氏兄弟가 제정한 남전향약의 四大綱領(德業相勸, 過失相規, 禮俗相交, 患難相恤)을 기본 운영 방침으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節目은 沙月의 法을 참작하고, 東萊約條를 따르며, 鄭逑의 序文을 수록했었다고 한다. 위의 제 규정과 서문은 확인되지 않는데, 일찍이 성주목과 연고를 가지고 시행되었던 향약으로 여겨진다. 이중 沙月의 法은 사월동에서 시행되던 향약으로 생각되는데, 이곳은 지금의 星州郡大家面七峰里 일대이다. 사월동에서는 鄭逑와 金宇顒가 출생하였는데 광주이씨들은 일찍이 정구, 김우옹 등과 많은 인연을 맺어 왔으며, 이도장 또한 정구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어 사월동의 향약이 상지방에서 시행된 향약에 큰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625년에 시행된 향약의 跋文은 이도장의 부친이 작성했다고 나타나 있는데, 이도장의 부친은 李潤雨로 역시 상지동 일대에 거주한 인물이다.
향약 결성 이후 10년 간은 꾸준히 향약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히 흉년을 만나 소장하고 있던 義穀은 모두 도적을 당하고 稧中의 文籍은 남은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제 다시 향약을 정비하려 해도 전일의 서문과 발문 등이 없어 참고할 자료가 없다며 한탄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여러 벗들과 장로들이 부탁을 해서, 이렇게 전말을 기록하게 되었다며 「향약기」를 작성하게 된 연유를 밝히고 있다.
이어서는 향약의 유래와 의의, 사월동과 본방에서의 향약 시행 등이 나열되어 있다. 먼저 大司徒가 교화를 주관하였고 지방에서 五敎를 펴며 六行을 권면했다는 『周禮』의 기록을 들어, 이것에서 損益하여 향약이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특히 앞선 임금 대에 김우옹과 盧守愼가 조정에 建白하여 향약의 전국적인 시행을 건의하였으나, 新進浮薄의 무리들이 반대하여 시행되지 못했으니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 했다. 실제 宣祖 연간에 盧守愼의 建白으로 전국적으로 향약이 실시되었으나 곧 조정에서의 의견 불일치로 중단된 일이 있었다. 당시 김우옹, 노수신과 당색을 달리하던 李珥의 경우 향약 시행보다 먼저 민생의 안정이 우선이라며 향약의 일괄적인 시행을 반대하였었다. 이에 우리 선생께서 안타까워하며 동리에서 향약을 시행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곧 사월동의 향약이다. 향약이 시행됨에 昏娶喪葬의 어려움이 없게 되었으니, 옛적 子張이 이른바 “可驗之一鄕者”라 한 것과 다를 바 없다며 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이유로 본방에서 향약이 시행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서로 권면하는 것이 本이고 서로 돕는 것이 末이니 처음에 본방의 향약도 本末이 잘 갖추어졌었으나, 10년 동안 본말이 뒤바뀌게 되어 옛 규정들이 종이 위의 空言이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이어 문적이 蕩盡된 상황에서 이제 重擧脩集하는 役을 행하게 되었다며, 권면하고 함께 경계해 줄 것을 청하여 모두에게 승낙을 받았다고 하였다. 이에 1625년에 만들어졌던 약조를 옆에 부기한다고 밝히며 「향약기」를 마치고 있다. 그러나 「향약기」가 수록된 이도장의 문집에는 당시의 약조가 수록되어 있지 않아, 향약의 구체적인 성격은 다른 자료를 통해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향약기」를 통해서는 향약 시행 지역인 本坊을 명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향약기」 작성자인 이도장이 거주하였던 곳임을 감안하고, 그의 부친인 이윤우가 1625년 결성 당시 발문을 작성한 것으로 보아 광주이씨가 세거하던 동리인 상지방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와는 별도로 상지방에서는 상지향약이 시행되고 있었다. 이 향약은 1602년에 결성된 것으로, 상지방에 세거하고 있는 광주이씨들과 그 인척들이 주축이 된 일종의 族契로 「향약기」의 향약과 성격이 다른 별개의 향약이다. 즉 「향약기」의 향약은 一坊 단위의 동약으로 구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중기 향약 시행의 추이와 경상도성주목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약 보급 이후 재지사족들은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洞里 단위의 향약을 시행해 나갔으니, 洞約 또는 洞契 등으로 명명되었다. 「향약기」에 수록된 향약 역시, 작성자 이도장이 거주하던 경상도성주목상지방 일대에서 시행되던 동약으로 여겨진다. 동약에는 상지방 일대에 거주하던 재지사족들이 참여했을 것이며, 권면과 상부상조를 통해 상호 간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향촌 내에서의 지배질서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에서 향약이 운영되었을 것이다. 한편 본 향약의 모태는 사월동의 향약이라 하였는데, 사월동은 정구와 김우옹이 출생한 곳이며 특히 김우옹의 후손에 세거하는 동리이다. 또한 상지방에는 이도장과 그의 부친으로 1625년 향약 결성 때 발문을 작성했던 이윤우가 세거하고 있다. 이윤우, 이도장 부자는 모두 정구의 학통을 이은 인사로 당대 학문적 인연을 매개로 향리에 향약을 보급해 가던 성주목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다.
『洛村集』, 李道長,
『京山誌』,
『漆谷誌』,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漆谷郡誌』, 漆谷郡, 漆谷郡, 1994
『朝鮮時代 廣州李氏의 삶과 學文』, 韓國歷史文化硏究院, 서울歷史博物館, 韓國歷史文化硏究院, 서울歷史博物館, 2004
이광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