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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안(高尙顔) 결계서(結契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3+KSM-WC.0000.4728-20110630.Y114130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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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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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문집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주체 고상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형태사항 크기: 29.8 X 20.3
판본: 목활자본
장정: 선장
수량: 3권 6책
판식: 半郭 : 15.2x19.8㎝, 四周雙邊, 有界, 10行20字,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중앙도서관 / 경상북도 경산시 대동 214-1

안내정보

고상안(高尙顔) 결계서(結契序)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문경시(聞慶市)영순면(永順面) 출신의 고상안(高尙顔)이 작성한 것으로, 이 지역에서 시행되던 향약의 서문이다. 고상안은 16세기 후반 강설(姜雪)과 함께 향약을 실시하였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으로 향약이 중지되자, 고향의 여러 인사들과 협의하여 향약을 다시 제정하고 그 서문을 작성하게 된 것이다. 서문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향약의 정확한 시행 지역과 연혁 및 규정은 자료의 부족으로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여기에서는 임진왜란 직후 향약 제정을 통해 피폐해진 향촌사회를 복구하려는 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정도이다.
이광우

상세정보

조선중기 慶尙道龍宮縣西面尙州牧永順面 일대에서 결성되었던 契 조직의 序文으로, 임진왜란 이후 重修하는 과정에서 서면 출신의 재지사족 高尙顔이 작성
泰村集 地泰村先生文集 卷之三 序 結契序泰村先生文集 卷之三 九
一 : 卷1 賦,詩, 卷2 詩,輓詞,箋,書 / 二 : 卷3 書,序,記,贊,說,上樑文,策題,奉安文,祭文,碑銘,雜著, 卷4 效嚬雜記上 / 三 : 卷5 效嚬雜記下, 卷6 附錄
[내용 및 특징]
16세기 이후 士林 세력에 의한 향약 보급이 각 고을별로 확산되어 갔다. 사림 세력은 향약의 자치규정을 매개로 향촌사회 지배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이러한 향약은 종전의 鄕規 및 여러 契 조직의 규정과 접목되어 시행되기도 했으며, 향촌지배와 사족 간의 결속력 강화를 목적으로 새롭게 결성되기도 하였다. 향약은 시행범위와 대상에 따라 명칭과 운영상의 성격에 있어 차이가 나는데, 대체로 동리를 단위로 시행되는 향약은 洞契 또는 洞約이라 불렸으며 혈연과 혼인관계를 매개로 결성되었을 경우 族契 또는 族約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성격에 있어서는 相扶相助를 통한 사족 간 결속력 강화가 주된 목적이었지만, 거주지와 그 인근의 하층민까지 포함시켜 실질적인 사족 주도의 향촌자치 규정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조선중기 慶尙道龍宮縣西面(現 慶尙北道聞慶市永順面으로 일부 편입) 및 尙州牧永順面(現 慶尙北道聞慶市永順面으로 편입) 에서도 이러한 향약의 흔적이 확인되는데, 이곳에는 일찍이 濟州高氏와 晉州姜氏 등의 사족 가문이 정착하고 있었다. 본 자료는 임진왜란 직후 이곳에서 契 조직이 重修되자 제주고씨 출신의 高尙顔에 의해 작성된 서문이다. 현재로서는 고상안의 문집에 「結契序」라는 제목으로 서문만 남아 있어, 정확한 계의 명칭과 연혁 및 규정 등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서문을 통해 시행 시기와 성격만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난 어느 해에 尙顔博士姜雪이 讀書하는 것으로 契를 맺어 서로 권장하고 시험하였다. 때때로 會面하니, 刮目相對한 것이 여러 해였다. 兵火가 있은 후에 혹은 요절하고 혹은 考終하여 남아 있는 사람이 6~7인일뿐이다. 서로 함께 慨然히 옛 것을 돌이키기를 생각하여, 이에 현재 남아 있는 인원과 뒤를 이은 후손이 다시 전일의 규약을 찾고, 또 子弟로 들어오기를 원하는 자는 입록을 허락하였다. 그 이름은 보존하였으나 實은 다르니, 봄과 가을 講信하는 날 외에 또 生辰의 모임이 있으면 衰老한 지경에 이른 분들에게 여러 번 談笑의 자리를 열어 주었다. 될 수 있는 대로 간편함을 쫒고 眞率함을 많이 본뜨니 그 뜻이 심히 아름답고, 그 道는 가히 이을 만하다. 나와 善承(高仁繼의 字)이 만나 함께 약속하면서, 비록 말하기를 “꼽추병신이라도 일찍이 동쪽 구석에서 잃어버린 것을 한탄하고, 감히 서쪽 뽕나무 느릅나무 밭에서 얻는 것을 잊겠는가(籧篨 曾恨東隅之失 敢忘桑楡之收)” 했기에, 某月日에 契長의 집에서 모두 모이기로 하였다. 이미 나에게 作文을 부탁한지 오래되었으니, 사양하지 못하고 간략하게 顚末을 敍한다.
우선 서문에서는 최초 고상안姜雪 주도로 結契가 이루어졌음이 확인되며, 春秋講信 때의 講學이 주된 목적이었음이 확인된다. 그런데 결계가 兵火, 즉 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다가 이루어졌다고 나타난다. 고상안용궁현旺泰洞에서 태어나 관직생활 할 때를 제외하고는 줄 곳 그곳에서 거주하였으며, 1608년에야 禮洞, 즉 지금의 문경시흥덕동 일대로 이주하였다. 또한 후일 고상안과 계의 중수를 약속하는 고인계강설도 이 일대 출신으로 확인되기 때문에, 이상의 契가 16세기 후반 지금의 문경시영순면 일대에서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동으로 이주한 1608년 이전에 契가 重修된 것으로 추측된다.
[자료적 가치]
임진왜란 전후 향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에 향약을 시행함으로써 사족 간의 결속력 강화 및 질서유지를 도모하였으며, 향촌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 규범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 지역의 향약은 임진왜란으로 중지되었는데, 전란이 끝나자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 복구와 아울러 향약 중수를 시도하였다. 전란으로 계원들이 사망, 이주한 가운데 향약의 중수를 통해 약화된 사족 간 결속력 강화를 도모했던 것이다.
『泰村先生文集』, 高尙顔,
『尙山誌』,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民族文化論叢』8, 鄭震英,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1987
『尙州誌』, 尙州市,郡文化公報室, 尙州市,郡, 1989
『조선후기 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民音社, 1990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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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고상안(高尙顔) 결계서(結契序)
結契序
往在某歲尙顏姜博士雪結契讀書以相勸課時
焉會面刮目相對者有年矣兵火之後或橫夭或考
終餘存只六七人而已相與慨然思欲復古乃與見
在之員及繼世之胤更尋前日之約且許子弟之願
入者存其名異其實春秋講信之外又有生辰之會
要使衰老之境屢開談笑之場務從簡便多倣眞率
其意甚美其道可繼邀余及善承同約雖曰籧篨曾
恨東隅之失敢忘桑楡之收某月日齊會于契長家
約束旣屬余作文久不獲辭畧敍顚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