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이후, 重修한 永川鄕校大成殿의 上梁文後識.
내용 및 특징
본 문서는 임진왜란 이후, 재건된 永川鄕校大成殿의 퇴락으로 인해 大成殿을 重修하면서 上梁文을 지을 때, 朴暾이 중수상량문과 함께 지은 上梁文後識이다. 본문의 내용에 의하면, 1513년 永川郡守金欽祖가 大成殿을 건립했는데, 1570년 승려 岑에 의한 화재가 있었고, 1592년 倭軍의 침입으로 大成殿건물전체가 소실되어 버렸다. 이 때 全三益등이 位板을 가지고 피난하여 紫陽洞圓覺村에 임시 봉안하여 位板만은 소실을 면했다. 1599년 李國賓 ․ 崔經濟등의 감독으로 大成殿 重修가 시작되어 때마침 부임한 永川郡守趙濈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1601년 공사가 완료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막 끝나고 공사가 시작되었으므로 자재설비가 미흡하여 비가 새는 등, 전후의 혼란기에 서둘러 공사를 완료했던 까닭에 大成殿의 重修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前義禁府都事鄭諶 ․ 원로선비 成立등이 永川鄕校 齊任을 맡고있는 成以諒 ․ 孫繼昌등과 함께 수령에게 보고하여 大成殿을 重修하도록 하였다. 이에 1621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622년에 상량하였다. 승려 宥安이 地勢를 살렸고, 徐因右 ․ 韓德甘 ․ 李莫乃 ․ 金福男 ․ 卞景立 ․ 千福등이 공사에 참가하였다. 이를 총괄한 사람은 行郡守黃孝儀였다.
자료적가치
조선의 鄕校 대부분은 임진왜란 당시 큰 피해를 입고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鄕校는 문물교화의 중심이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종결되자마자 피해를 당한 향교들은 서둘러 重修 ․ 再建되기 시작하였다. 본 上梁文을 통해서도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 永川鄕校의 혹심한 피해와 再建을 위한 努力을 잘 알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民族文化硏究所,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慶尙北道, 1991
民族文化硏究所,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