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년에 畏齋 柳宗春의 學行을 본받고 친족들간의 학업과 우애를 다지기 위해 만든 계로서 참여자 명단과 학계의 유래 및 운영규정을 결의한 完議를 묶은 學稧案이다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19세기초에 시행된 河回의 豊山柳氏 學稧案이다. 풍산류씨 문중은 영남의 명문이 거의 대부분 그러하듯 학문의 전수에 있어 가학적 성향이 두드러진다. 이 가문의 가학적 계보는 크게 안동의 河回와 상주의 愚川으로 양분되는 양상이다. 류진의 큰 조캉인 拙齋 柳元之로부터 갈라진 하회의 가학 계보는 柳宜河-柳世哲-柳世鳴-柳後章-柳聖和-柳聖會-柳澐-柳규(氵+奎)-畏齋 柳宗春-柳相祚-柳台佐 등 쟁쟁한 학자가 포진해 있다. 이들은 안동의 서부 유림의 핵심을 점하면서 이른바 屛論을 주도하여, 金誠一, 李象靖을 퇴계의 嫡傳으로 옹립하려 끊임없이 시도하던 안동 동부의 虎論을 견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송논쟁 과정에서 영남 전체 유림의 공론을 결집하여 중앙으로 전달하는 역량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 학계는 류종춘이 늙어 죽기 전까지 가학을 이어서 향촌에서 글을 읽고, 학숙을 열어 족친을 가르쳤는데, 그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을 위하여 친족들끼리 서로 가까이 하고, 떨어져있더라도 바르게 이끌어 나가기 위한 뜻으로 이 학계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이에 각자의 이름을 이 계안에 적고 같은 뜻으로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하였다. 그리고, 매번 계원이 함부로 모임의 물물을 사용함에 따라 분쟁이 생기니, 학계 본래의 좋은 뜻을 지키기 위하여 뜻을 모아 完議로 만드니, 이후 계원을 빙자하여 물건을 훔치거나, 유사가 독단으로 아무 이유없이 그 같은 폐단을 저질렀을 경우나, 계비를 부실하게 납부하는 자는 스스로 모든 비용을 충당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런 절차를 거쳐 완성된 학계안은 그 좌목에 나이순에 따라 성명과 출생년, 자호를 적었다. 좌목에는 류씨 79명, 이씨 2명, 안씨 1명으로 류씨가 압도적으로 많은 수를 보이고 있다. 기타 성씨들도 이들과 인척관계에 있으며, 결국 이 학계는 풍산류씨 가문의 족계의 한 형태이다. 또한 柳相祚, 柳台佐 등도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문과 및 사마시에 합격한 자들도 다수이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安東의 契』, 安東民俗博物館 編, 安東民俗博物館, 2006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