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년 영양향교(英陽鄕校) 대성전(大成殿) 중수(重修)시에 원납(願納)한 사람들의 신역(身役)을 면해주기 위하여 만든 명단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英陽鄕校 大成殿 重修시에 願納한 사람들의 身役을 면제 해주기 위하여 만든 명단이다. 願納은 스스로 원하여 물력을 지원하는 것으로서 본 문서에서는 己酉와 己巳년의 두 차례에 걸쳐 원납이 이뤄지고 있다. 두 번 모두 대성전을 중수하는 것으로서 정확한 연대를 알 수는 없다. 영양지역은 조선 건국 후 오랫동안 폐현으로 있다가 1676년 군민의 진정으로 復縣 되었다가 곧 폐현되어 영해부에 환속되었으며, 1678년에는 진보현에 영속되었다. 1683년에 다시 복현되어 현재의 위치에 향교를 창건하였다. 향교의 건립에는 士民의 資力과 努力이 컸다. 그 후 대성전과 명륜당 그리고 育英樓가 점차 낙성되었다. 1683년 향교 영건시에 대성전과 명륜당이 세워지고 10여 년이 지난 1699년에 육영루를 건립하였다. 이후 대성전은 여러 차례 수리를 가하였지만 처음 규모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영양 영양향교 立約節目 등에는 향교 有司의 역할 중 하나로서 담장과 殿宇의 상태를 수시로 점검하여 수리가 필요할 경우 官에 보고한 후 수리토록 하고 있다. 하지만 수리와 관련한 모든 비용을 관에서 부담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실제 본 문서에 나타나는 대성전 중수 당시의 願納한 이유를 살펴보면, 향교내의 物力이 모자라서 工匠들에게 줄 음식을 공궤하는 것도 조금 밖에 되지 않았으며, 기와를 굽고 단청을 채색하는 것과 각각의 工匠들이 손수 작업하는 모든 것들의 자금은 이미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한 때에 良丁 내지 公私賤吏의 役을 지는 5명이 자발적으로 그 所用되는 물자를 多少 捧納하여 이를 더하여 重修를 마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校中은 完文을 작성하여 願納을 한 자들에게 각각 나눠주고, 향교에서도 후에 이러한 일을 고찰하기 위하여 列書 1책을 비치한다고 하였다. 완문이 없어서 그 내용을 상세히 알 수는 없지만, 말미에 願納人 각 개인이 어떠한 役으로 인한 침해가 있으면, 執綱은 그 즉시 官에 고하여 그들의 役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다. 또한 이렇게 願納人들에 대하여 역을 면제해주는 혜택은 향교에 대한 願納이 다른 사례의 願納에 비하여 특별나기 때문이며, 완문에 의거하여 이후로는 원납인들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조선후기 避役수단의 한 방법으로 願納을 이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願納할 만큼의 자금을 동원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양민은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두 차례의 重修시에 願納한 인원들을 보면 기유년에는 3명, 기사년에는 5명이 기재되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영양 영양향교는 그 영건시기가 비교적 늦은 17세기 말기였으므로 그 설립과정이나 재원인 校位田畓과 校奴婢의 확보과정이 자료상으로 분명히 드러나 있다. 초창기부터 1907년까지 작성된 鄕校田案을 보면, 창건직후 11결 41부 3속 정도였던 田畓이 1720년까지는 비교적 많은 전답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1865년에는 크게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동안 文簿의 농간이 향교유림에 의해 저질러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의 경우에는 향교가 건립된 후 5년이 지난 1687년 12월에 노비 10구가 분급되었다. 이러한 획급노비는 18세기 초에는 72구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매득노비도 꾸준히 증가하여 18세기 이전에 4구였던 것이 76구가 되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영남지방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향교노비가 도망하거나 사회경제구조의 변동에 따른 신분질서의 붕괴로 말미암아 원래 향교유지에 필요한 재정적 기반으로서의 기능은 없어졌다.
성책의 공증을 위하여 수결한 수령과 掌議, 上有司, 都監 중 장의와 상유사의 경우 趙氏가, 도감은 吳氏, 南氏, 李氏, 具氏가 맡고 있었다. 1684년에 작성된 執綱錄과 奉安時執事分定記를 분석하면 17세기말 영양현의 향촌지배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던 가문은 漢陽趙·英陽南·咸陽吳氏를 중심으로 英陽金·奉花琴·安東權·綾城具氏 등이었다. 이런 현상은 1786년과 1875년의 校案에서도 큰 변화없이 나타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이 원납성책이 만들어진 것은 향교 재임들의 명단으로는 짐작하기 어렵고, 향교의 경제적 기반이 약해가던 19세기 이후로 판단된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慶尙北道·嶺南大學校, 三光出版社, 1991.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