丙辰년 7월에 작성된 釋奠祭에 사용할 祭物의 종류와 수량을 기록한 謄錄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영양 영양향교에서 丙辰年 7월에 작성된 것으로 8월 上丁日에 열리는 釋奠祭에 사용할 제물의 목록과 수량을 적은 것이다. 석전제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하는 조선사회에서 향촌의 교화와 사림들의 집회의 장이 된다는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석전제의 규모와 절차는 중앙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실제 중앙의 文廟와 지방의 大成殿에 제향된 聖賢들의 수에서도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제사에 진설되는 제수의 양과 종류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다. 특히 지방에서는 지방 군현의 읍격에 따라서도 석전제의 규모를 달리하고 있었다.
영양의 경우는 17세기 말에 복현된 후에야 비로소 현감이 파견되었다. 또한 여타 지역에 비하여 邑格이 낮고 규모가 작은 관계로 향교에 봉안하는 神位의 수를 減하여 小設位로 제향을 하였다. 즉 5聖, 宋朝4賢, 東國18賢 등 27位만을 봉향한 것이다. 석전제에 사용하는 祭需는 양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그 형태를 달리하고 있다. 釋奠祭는 제사의 제향날짜와 제수를 본따서 上丁祭, 丁祭, 釋菜라고도 하였다. 이는 음력 2월과 8월의 上丁日에 제사를 지내므로 上丁祭 내지 丁祭라 하였으며, 釋奠이라는 이름이 菜를 놓고 幣을 올린다는 것에서 유래하였기에 釋菜라고도 하였다. 처음에는 이처럼 간략하게 채소만 놓고 지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고기와 과일 등 풍성한 제물을 마련하여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조선전기에는 채소만을 놓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16세기 중엽 南孝溫이 竹山縣에 이르러 죽산향교의 釋菜禮에 참가한 후 느낌 소감을 시로 지었는데, 그 글에서 상정일 釋奠은 中牢로 모셔야 하는 법인데 양이나 돼지 등의 고기를 사용하지 않고 성의 없이 치러진다고 한탄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에 작성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釋奠笏記나 釋奠祭物目을 적은 單子를 보면 조선후기에는 모든 향교에서 고기와 과일을 비롯한 많은 종류의 제수가 陳設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진설되는 祭物의 종류는 중앙과 지방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중앙의 성균관에서는 大牢라 하여서 소, 돼지, 양을 犧牲으로 사용하지만, 지방에서는 中牢로서 돼지와 양을 사용하였다. 또한 성균관에서는 5聖位에는 12豆, 12籩, 2簠, 2簋, 3腥, 3大羹, 3和羹, 3酒, 3熟肉, 幣帛 등 大祀의 규모로서 가장 크며, 나머지 神位인 從享位에는 2豆, 2籩, 1簠, 1簋, 1腥, 1酒로서 각각의 신위에 차려진다. 향교에서는 五聖位에는 8豆, 8籩, 2簠, 2簋, 2腥, 3酒, 幣帛이 진설되며, 종향위에는 2豆, 2籩, 1簠, 1簋, 1羹, 1酒로서 성균관에 비해서 규모가 작아진다.
성균관에서 사용되는 12籩는 대나무로 만든 제기에 栗黃·乾棗·榛子·菱仁·芡仁·鹿脯·魚鱐·刑塩·白餠(절편, 멥쌀)·黑餠(수수떡)·糗餌(기주떡, 증편)·粉餈(인절미)등을 담은 것이다. 12豆는 나무로 만든 제기에 젖은 제수를 담는 것으로 韭菹·筍菹·菁菹·芹菹·鹿醢·魚醢·兎醢·醓醢·脾析(처녑)·豚拍(돼지 겨드랑이 살)·酏食(경단)·糝食(부끄미)이다. 2簠은 유기로 만든 제기로 네모지며 稻(쌀)·梁(기장)을 담는다. 2簋은 유기로 만든 둥근 제기로서 黍(수수)·稷(피)를 담는다. 3腥은 豚腥, 羊腥, 牛腥이다. 3大羹은 소, 양,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고기국물로서 간을 하지 않는다. 3和羹은 大羹에 소금, 매실, 계피, 생강, 구기자를 넣은 것이다. 3熟肉은 소와 양의 腸·胃·肺, 돼지 껍데기(豕膚)를 익힌 것이다. 幣帛은 5척의 흰명주나 흰모시를 말한다. 성균관의 종향위에는 2변(녹포, 율황), 2두(녹두, 청저), 1보(稻), 1궤(黍), 1腥(豚腥), 淸酒 만을 사용하였다.
한편 지방의 향교에서는 공자의 正位를 기준으로 좌측에는 8籩와 羔腥, 우측에는 8豆와 豕腥, 중앙에는 2簠, 2簋, 幣, 3爵(醴齊, 盎齊, 淸酒)을 두었다. 종향위에는 좌측에 2籩, 우측에 2豆, 중앙에 1簠, 1簋, 豕腥, 淸酒을 두었다. 8籩은 黃栗·乾棗·榛子·菱仁·芡仁·鹿脯·魚鱐·刑塩이며, 8豆는 韭菹·筍菹·菁菹·芹菹·鹿醢·魚醢·兎醢·醓醢이다. 2簠는 稻·染(기장), 2簋는 黍(수수)·稷(피), 2腥은 豕腥·羔腥이며, 幣는 흰모시, 醴齊는 술과 찌꺼기가 섞인 탁한 술(막걸리)로서 犧樽에 담아 初獻에 쓰며, 盎齊는 백색의 술로서 象樽에 담아 亞獻에 쓴다. 淸酒는 겨울에 빚어 여름에 익은 맑은 술로서 山壘에 담아 終獻에 쓴다. 齊와 酒는 모두 찹쌀과 누룩으로 만든 술인데, 酒는 맛이 진하여 사람이 마시고, 齊는 맛이 엷어서 제사에 쓴다. 종향위의 2籩은 鹿脯·黃栗이고, 2豆는 鹿豆(葛根=칡뿌리)·菁菹이다. 1簠는 稻이고, 1簋는 黍, 1腥은 豕腥이다.
이상의 내용을 참고하여 영양 영양향교에서 병진년 7월에 가을 석전제를 위하여 준비한 제수물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술 담글 쌀(酒大米) , 누룩(曲子), 밥 지을 쌀(飯白米), 기장쌀(染米), 수수쌀(黍米), 피쌀(稷米), 사슴고기 포(鹿脯), 말린 물고기포(대구광역시포, 魚鱐), 마른 소금(刑塩), 잣(榛子), 마름(菱仁), 대추(大棗), 밤(黃栗), 연밥열매(芡仁) 대신 잣(柏子), 죽순김치(荀菹) 대신 수갱(水羹), 미나리 김치(芹菹), 무김치(菁菹), 부추김치(菲菹), 소고기 젖(醓醢), 사슴고기젖(鹿醢), 물고기 젖(魚醢), 토끼고기 젖(兎醢), 돼지고기(豕腥), 양고기(羔腥), 큰 촛불(大燭) 2자루, 중간 촛불(中燭) 8자루, 작은 촛불(小燭) 16자루, 창호지, 黃毛筆, 眞墨, 祝文紙, 幣布, 香, 기름종이, 등잔기름, 네모난 상자, 者子席, 푸른 보자기(靑褓), 푸른 자루(靑帒), 항아리(缸), 櫃, 자물쇠, 푸른 새끼줄(靑索) 등이었다.
대미와 누룩은 술을 담그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5성위에 쓸 8籩, 8豆, 2簠, 2簋, 2腥의 제수물품과 종향위에 쓸 것 모두를 준비하고 있다. 특히 正位와 從位에 함께 쓰이는 쌀, 수수, 밤, 무김치, 육포 등은 같은 위치에 쓰이는 다른 물품에 비하여 그 수량을 많이 구입함으로써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다만, 종향위에 사용하는 2豆 중 菁菹만이 나오고 鹿豆(칡뿌리)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외에도 다양한 크기의 초와 犧牲의 피와 고기를 담을 그릇, 돗자리, 자물쇠, 기타 집사분정에 필요한 紙筆墨 및 각종 상자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상의 제수물품 중 일부는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사용하고 있다. 榛子는 잣으로 대신하고, 筍菹는 도라지로, 芡仁은 호두로 대신한다. 또한 鹿脯는 소고기 포로 대용한다. 菱仁은 은행으로 대신하고 있다. 醓醢는 돼지고기 장조림으로, 鹿塩은 소고기 장조림으로, 兎醢는 닭고기 장조림으로 대용한다.
조선후기 향교의 사회교화적 기능으로서는 釋奠祭 및 朔望焚香, 여러 祀典 등의 봉행을 들 수 있다. 유교저거 이념을 국시로 표방한 조선에서 유교적 규범을 향촌사회에서 보존, 보급시키기 위한 노력으로 춘추석전과 삭망분향의 봉행을 대단히 중요시 하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행사는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져 향교의 고유 행사로 정착되었다. 조선후기에 향교의 교육적 기능이 쇠퇴하고, 재정의 어려움으로 향교가 피폐해졌지만 고유의 제의기능인 춘추 석전과 삭망분향의 享祀를 통한 교화의 기능은 오늘날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釋奠은 유교적 규범의 보급과 보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행사에 회동한 사람들이 한 지방의 공론을 조정했기 때문에 주목되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이래로 仲春 및 中秋의 上丁日에 행해진 석전은 현재까지도 향교의 가장 중요한 행사로 남아있다.
석전이 거행되는 성균관의 文廟는 유학의 정통에 기여한 선현들을 향사하는 곳이며, 그 향사에는 석전제뿐만 아니라 삭망의 분향과 수시로 행해지는 展謁이 있었다. 문묘에 향사되는 공자 이하의 위차는 고려시대의 국자감과 향학에서 시행된 것을 이어서 행해졌으며, 대성전의 正位에는 5聖(孔子, 顔子, 曾子, 子思, 孟子) 중 으뜸인 공자를 봉안하고 나머지 4聖을 배향하였다. 10哲(閔損, 苒耕, 苒雍, 宰予, 端木賜, 苒求, 仲由, 言偃, 卜商, 顚孫師)과 송조 6賢(朱敦頤, 程顥, 程頤, (邵雍, 張載), 朱子)은 殿內에 從享하였다. 동서무에는 중국 역대 유현 94位를 종향하고,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동국 18현 중 정몽주 이하 15현은 조선조에 들어와서 유림들의 상소에 의해 東西廡에 종향되었다. 하지만 중앙과 달리 지방의 향교에서도 이와 같이 봉안하였던 것은 아니고 고을의 크기에 따라 대설위, 중설위, 소설위로 나누어 봉안하는 신위의 수를 차감하였다. 대설위는 성균관의 문묘와 같은 규모로 봉안하고, 중설위는 牧使, 府使, 郡守가 다스리는 州, 府, 郡에서 시행하였으며, 공자 주향에 4성을 배향하고 10철과 宋朝 6현을 殿內에 종향하였다. 동서무에는 東國 18현을 종향하였다. 소설위는 縣令, 縣監이 다스리는 縣으로서 공자 주향에 4성위를 배향, 송조 4현(周濂溪, 程明道, 程伊川, 朱晦菴)을 전내에 종향하고 동국 18현을 동서무에 종향하였다. 東廡에는 薛聰, 安裕, 金宏弼, 趙光祖, 李滉, 李珥, 金長生, 金集, 宋浚吉 등을 西廡에는 崔致遠, 鄭夢周, 鄭汝昌, 李彦迪, 金麟厚, 成渾, 趙憲, 宋時烈, 朴世采 등을 종향하였다. 하지만 현재의 영양 영양향교는 1932년에 동서무를 철거하면서 대성전내에 모든 신위를 모시고 있다. 이러한 문묘는 聖殿이라 하여 향교의 건물 중 특별히 守護되었으며, 이곳에서 봉행되는 석전제는 엄격한 규범이 적용되었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르면 석전의 규범이 종종 어그러졌다. 춘추석전은 국가의 중요한 행사였기 때문에 그 제기의 진열에까지 까다로운 절차가 적용되었으며, 祭需도 規式에 맞게 마련토록 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이러한 규범이 지켜지지 않게 되자, 국가에서는 지방관에게 공문을 보내 철저한 감독을 지시하였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食生活文化學術誌, 11, 김천호, 1996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