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奉化三溪書堂에서 重刊한 冲齋集 때문에 退溪의 諱字 是非와 관련하여 英陽鄕校에 보낸 通文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1931년 奉化의 三溪書堂에서 重刊한『冲齋集』 에서 退溪의 諱字를 바꾼 것에 대한 陶山書院의 通章을 받고 이에 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적어서 英陽鄕校로 보낸 通文이다. 18세기 이후 영남지역 향촌사회내 갈등은 향론의 분열에 따른 씨족과 문중을 중심으로 한 유림간의 대립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유림간의 각종 향전의 내용은 주로 書院·祠宇의 配享, 追享, 위패의 위차문제 및 先祖의 학통과 師友淵源문제, 문집간행과 文字是非 등을 두고 씨족·학파·문중 간에 야기되는 우열 경쟁이었다. 향촌사회에서의 이러한 향전은 재지사족간에는 일반적인 현상인데 특히 영남에서는 19세기 이후 더욱 격화되었다. 즉 19세기 중엽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향촌내 사족간의 갈등은 문중간 뿐만 아니라 문중 내에서도 系派간으로 세분되면서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18세기 이후 영남의 사족들은 道內와 鄕內의 공동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는 공동보조를 취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각 가문의 이해가 상충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院祠나 鄕校를 기반으로 하여 향론을 결집시켰던 것이다. 이 통문의 내용도 冲齋 權橃의 후손을 중심으로 한 삼계서당과 도산서원 사이에서 冲齋의 문집간행을 두고 발생한 文字是非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삼계서당 통문에는 柳厚根, 權璥夏 외에 16명이 발의하고 있는데, 이중 權橃의 후손인 安東權氏가 10명이며, 豊山柳氏가 4명, 安東張氏, 長水黃氏, 奉化琴氏, 義城金氏가 각각 1명씩이었다. 이들은 모두 봉화지역에 世居해온 士族들이며, 일부는 酉谷의 안동권씨와는 혼인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또한 이 통문이 작성된 시기는 족보를 통해 확인 가능한 인물들의 생몰년을 통해 辛未年이 1931년임을 알 수 있다. 이 是非는『冲齋集』을 重刊하면서 附錄篇에 있는 退溪의 諱字를 고친 것을 陶山書院에서 문제 삼아 通章을 보내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삼계서당에서 받은 通章의 내용이 무엇인지 상세히 고찰할 수 없지만 「汾李講誣事變日錄」을 참고하면, 퇴계선생의 諱字를 함부로 고친 것은 퇴계를 능멸한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퇴계가 살아있을 때 만들어진 靜庵 趙光祖와 晦齋 李彦迪 등 先賢의 문집에는 퇴계의 문장 말단에 성명이 그대로 적혔지만, 퇴계 사후 만들어진 문집에서는 그 문집을 편찬하는 이들이 퇴계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글의 제목 아랫부분에 ‘先生’이라는 글을 첨가하였다는 것이다. 즉 當代에 글을 쓰면 그 글의 끝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이 法例인데, 글의 제목 밑에 이름을 적는 것은 후대에 후손내지 문인들이 그렇게 편집했다는 것이다. 즉 『충재집』에 있는 퇴계의 輓詞 같은 경우도 퇴계가 지은 것을 충재 사후 그의 후손과 문인들이 문집을 간행하면서, 퇴계의 글을 넣고 여기에 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退溪李先生’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다시 그 후손들이 함부로 퇴계의 諱字를 고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삼계서당에서는 자신들이 퇴계의 諱字를 함부로 고친 것이 아니며, 고치기 이전에 이미 道會에서 퇴계의 本孫과 참석했던 유생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라 항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많은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이강무사변일록』실린 庚午年(1930) 8월 11일의 通章은 봉화의 사족들이 보내온 것으로 『충재집』의 중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충재의 후손들과 사림들간에 改書하는 내용을 두고 異論이 있었는데, 그중 퇴계의 諱字를 改書하는 與否를 두고 가장 심각한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퇴계의 諱字를 고치고자 하는 本孫들의 뜻이 강하여 결과적으로 문집은 퇴계의 諱字를 고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이에 改本에 주력하여 판을 새겨 인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런 사실을 전하며 이를 막지 못한 자신들의 죄를 청하였다. 이 사건은 퇴계의 권위가 일제강점기하에서도 영남지역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퇴계의 諱字를 둘러싼 是非는 여러번 있었다. 「汾李辨誣事變日錄」을 보면, 1931년 汾川에 사는 聾巖선생의 후손들이 『聾巖續集』을 발간하면서 ‘退溪李先生’을 ‘退溪 李滉’이라고 명시하였다. 게다가 퇴계의 넷째 형인 溫溪 李瀣의 문집을 重刊할 때도 ‘先生’이라 쓰지 않고 ‘舍弟’라 명명하였다. 이런 일들에 대해 陶山書院 측에서는 불평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각 집안에 불편한 심기를 전하고 각 문중에서는 陶山書院 측에 자신들의 입장을 전하였던 것이다.
삼계서당에서 통문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충재선생 또한 퇴계와 마찬가지로 大賢이며, 둘의 관계가 서로 尊慕하는 사이였지만 사람들은 이를 잘 모른다고 하였다. 이번에 『冲齋集』을 重刊하면서 附錄篇에 있는 ‘退溪先生’ 이란 諱字를 고치는 것에 대하여 온당치 못한 바가 있기에 三溪書堂 道會에서 이에 대한 문제를 발의하여 의논 하였으며, 당시 자리에 참석했던 퇴계의 本孫 및 수많은 양반들이 모두 이에 찬성했던 것을 근거로 들면서, 퇴계선생의 諱字를 충재의 자손들이 사사로이 고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논의를 거친 후 1년 정도가 지나서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本府에서 허가를 받고, 三溪書堂에서 爬錄한 후 板에 글자를 새길 때까지 유림들 각각의 정성과 재물의 부조가 있었지만 결코 ‘退溪’라 한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通章을 보내어 이 板을 찍어서 세상에 반포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자, 이에 대해서 여러 僉尊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린 것이다. 이후에 다른 문집에서도 퇴계의 諱字를 고친 사실과 이러한 일들에 대한 일관된 규정이 없는 것을 말하며 자신들이 改書한 이번 일이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퇴계의 영남내의 위치를 의식하고서는 자세를 낮추어 자신들의 행동에 온당치 못함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퇴계를 존경하는 마음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결론은 알 수 없지만, 현전하는 1930년에 간행된 『冲齋集』에는 ‘退溪 李滉’이라고 改書한 것이 수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이후 영남의 鄕戰은 향론의 분열에 따른 씨족과 문중을 중심으로 한 유림간의 대립이 크게 작용하였다. 영남의 사족들은 공동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는 공동보조를 취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각 가문의 이해가 상충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院祠나 鄕校를 기반으로 하여 향론을 결집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이 문서는 봉화酉谷에 살던 충재의 후손들이 삼계서당을 중심으로 향론을 결집하여 인근 고을에 자신들의 대변하던 것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서 鄕戰과 관련한 사례연구에 도움이 된다.
『冲齋集』은 후손 權霂ㆍ權濡 등이 金秋吉ㆍ南亨會와 함께 士林에서 傳誦되는 것과 家藏日記에서 詩文을 수집하여 本集을 만든 후, 이미 撰定된 年譜를 권수에 두고 褒錫之典과 讚慕한 詩篇을 부록으로 엮어 洪汝河의 序文을 받아 1671년 三溪書院에서 간행(2권 1책)하였다. 그 후 李棟完과 權斗經이 詩文을 追入하여「拾遺」를 만들고, 부록을 증보ㆍ刪削한 후 權斗寅의 識를 붙여 1705년(4권 2책)에 간행하였다. 특히 權斗經이 지은「交遊錄」은 저자와 교유한 61명의 약전으로 중간본에만 실려 있다. 三刊本은 6대손 權萬이 遺稿와 家藏本『冲齋日記』를 11권으로 편차하여, 李光庭과 함께 간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하였다. 이에 후손 權薲이 여러 宗人과 함께 權萬이 손수 편집한 일기를 대조ㆍ토론하고 아울러 士友의 의론을 채집하여 이광정의 序를 받아 1752년(9권 5책)에 간행하였다. 위의 通文에서 문제된 것은 四刊本으로서 1929년을 전후한 시기에 重刊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후 1930년 봉화삼계서원(10권 6책)에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실록에서 발췌한 啓辭 24편 및 疏ㆍ箚ㆍ奏議와 私藏에서 얻은 咏歸詩 1편, 或人書 1편, 邊公墓誌를 本集에 增編하고, 실록과 교유인의 연보 등에서 새로운 사실을 종합하여 年譜를 증보하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인문과학 14집, 李樹奐, 경상북도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冲齋集, 權橃, 驪江出版社, 1985.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