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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봉화(奉化) 삼계서당(三溪書堂)에서 보내온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XF.1931.4776-20100731.Y1011309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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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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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권철연, 권윤하, 권일연, 권태섭, 권긍연, 영양 영양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작성시기 1931
형태사항 크기: 88 X 52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도계리 문중소개

안내정보

1931년 봉화 삼계서당에서 『충재집』 중간(重刊)때에 발생한 퇴계(退溪)의 휘자(諱字) 수정과 관련한 시비(是非)에 관해 영양향교에 보낸 통문
이 통문은 충재 권벌의 후손을 중심으로 한 삼계서당陶山書院 사이에서 발생한 문자시비(文字是非)와 관련한 내용이다. 즉 기존의『충재집』부록편에 있는 퇴계의 輓章에는 ‘退溪李先生’이라 되어 있었는데, 1930년 중간(重刊)하면서 ‘退溪 李滉’으로 개서(改書)한 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 통문은 류후근(柳厚根), 권경하(權璥夏) 외에 16명이 발의하고 있는데, 이중 권벌의 후손인 안동권씨가 10명이며, 풍산류씨가 4명, 안동장씨(安東張氏), 장수황씨(長水黃氏), 봉화금씨(奉化琴氏), 의성김씨(義城金氏)가 각각 1명씩이었다. 이들은 모두 봉화지역에 세거(世居)해온 사족들로서 일부는 봉화닭실마을의 안동권씨와 혼인관계로 이어져 있었다. 이 시비는 충재집을 중간하면서 부록편에 있는 퇴계의 휘자(諱字)를 고친 것은 퇴계를 존모(尊慕)하지 않기에 그런 것으로 보고 이를 문제 삼은 陶山書院에서 문집의 배포를 즉각 중지하라는 통장(通章)을 보내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삼계서당에서는 자신들이 퇴계의 휘자(諱字)를 함부로 고친 것이 아니며, 고치기 이전에 있었던 도회(道會)에서 퇴계의 본손(本孫)과 참석했던 유생들과 이 문제를 논의하여 동의를 받은 것이라 항변하였다. 이 사건의 결론을 알 수 없지만, 오늘날 1930년 간기(刊記)의 『충재집』을 보면 퇴계의 휘자(諱字)를 개서(改書)한 그대로 싣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인문과학 14집, 李樹奐, 경상북도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冲齋集, 權橃, 驪江出版社, 1985.
安東權氏大同譜, 안동권씨종보사, 2008.
이병훈

상세정보

1931奉化三溪書堂에서 重刊한 冲齋集 때문에 退溪의 諱字 是非와 관련하여 英陽鄕校에 보낸 通文
내용 및 특징
이 通文은 1931奉化三溪書堂에서 重刊한『冲齋集』 에서 退溪의 諱字를 바꾼 것에 대한 陶山書院의 通章을 받고 이에 대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적어서 英陽鄕校로 보낸 通文이다. 18세기 이후 영남지역 향촌사회내 갈등은 향론의 분열에 따른 씨족과 문중을 중심으로 한 유림간의 대립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러한 유림간의 각종 향전의 내용은 주로 書院·祠宇의 配享, 追享, 위패의 위차문제 및 先祖의 학통과 師友淵源문제, 문집간행과 文字是非 등을 두고 씨족·학파·문중 간에 야기되는 우열 경쟁이었다. 향촌사회에서의 이러한 향전은 재지사족간에는 일반적인 현상인데 특히 영남에서는 19세기 이후 더욱 격화되었다. 즉 19세기 중엽이후 영남내 班村을 형성하고 있는 곳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크고 작은 시비와 갈등이 있었다. 향촌내 사족간의 갈등은 문중간 뿐만 아니라 문중 내에서도 系派간으로 세분되면서 더욱 심각하게 전개되었다. 18세기 이후 영남의 사족들은 道內와 鄕內의 공동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는 공동보조를 취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각 가문의 이해가 상충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院祠나 鄕校를 기반으로 하여 향론을 결집시켰던 것이다. 이 통문의 내용도 冲齋 權橃의 후손을 중심으로 한 삼계서당도산서원 사이에서 冲齋의 문집간행을 두고 발생한 文字是非의 한 예라고 볼 수 있다. 삼계서당 통문에는 柳厚根, 權璥夏 외에 16명이 발의하고 있는데, 이중 權橃의 후손인 安東權氏가 10명이며, 豊山柳氏가 4명, 安東張氏, 長水黃氏, 奉化琴氏, 義城金氏가 각각 1명씩이었다. 이들은 모두 봉화지역에 世居해온 士族들이며, 일부는 酉谷의 안동권씨와는 혼인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또한 이 통문이 작성된 시기는 족보를 통해 확인 가능한 인물들의 생몰년을 통해 辛未年이 1931년임을 알 수 있다. 이 是非는『冲齋集』을 重刊하면서 附錄篇에 있는 退溪의 諱字를 고친 것을 陶山書院에서 문제 삼아 通章을 보내면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삼계서당에서 받은 通章의 내용이 무엇인지 상세히 고찰할 수 없지만 「汾李講誣事變日錄」을 참고하면, 퇴계선생의 諱字를 함부로 고친 것은 퇴계를 능멸한 것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퇴계가 살아있을 때 만들어진 靜庵 趙光祖晦齋 李彦迪 등 先賢의 문집에는 퇴계의 문장 말단에 성명이 그대로 적혔지만, 퇴계 사후 만들어진 문집에서는 그 문집을 편찬하는 이들이 퇴계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글의 제목 아랫부분에 ‘先生’이라는 글을 첨가하였다는 것이다. 즉 當代에 글을 쓰면 그 글의 끝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이 法例인데, 글의 제목 밑에 이름을 적는 것은 후대에 후손내지 문인들이 그렇게 편집했다는 것이다. 즉 『충재집』에 있는 퇴계의 輓詞 같은 경우도 퇴계가 지은 것을 충재 사후 그의 후손과 문인들이 문집을 간행하면서, 퇴계의 글을 넣고 여기에 그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退溪李先生’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다시 그 후손들이 함부로 퇴계의 諱字를 고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에 삼계서당에서는 자신들이 퇴계의 諱字를 함부로 고친 것이 아니며, 고치기 이전에 이미 道會에서 퇴계의 本孫과 참석했던 유생들의 동의를 얻은 것이라 항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 과정에서 많은 의견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분이강무사변일록』실린 庚午年(1930) 8월 11일의 通章은 봉화의 사족들이 보내온 것으로 『충재집』의 중간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충재의 후손들과 사림들간에 改書하는 내용을 두고 異論이 있었는데, 그중 퇴계의 諱字를 改書하는 與否를 두고 가장 심각한 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퇴계의 諱字를 고치고자 하는 本孫들의 뜻이 강하여 결과적으로 문집은 퇴계의 諱字를 고치는 것으로 결론이 났고 이에 改本에 주력하여 판을 새겨 인쇄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런 사실을 전하며 이를 막지 못한 자신들의 죄를 청하였다. 이 사건은 퇴계의 권위가 일제강점기하에서도 영남지역에 미치는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퇴계의 諱字를 둘러싼 是非는 여러번 있었다. 「汾李辨誣事變日錄」을 보면, 1931汾川에 사는 聾巖선생의 후손들이 『聾巖續集』을 발간하면서 ‘退溪李先生’을 ‘退溪 李滉’이라고 명시하였다. 게다가 퇴계의 넷째 형인 溫溪 李瀣의 문집을 重刊할 때도 ‘先生’이라 쓰지 않고 ‘舍弟’라 명명하였다. 이런 일들에 대해 陶山書院 측에서는 불평을 갖게 되었고, 그래서 각 집안에 불편한 심기를 전하고 각 문중에서는 陶山書院 측에 자신들의 입장을 전하였던 것이다. 삼계서당에서 통문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충재선생 또한 퇴계와 마찬가지로 大賢이며, 둘의 관계가 서로 尊慕하는 사이였지만 사람들은 이를 잘 모른다고 하였다. 이번에 『冲齋集』을 重刊하면서 附錄篇에 있는 ‘退溪先生’ 이란 諱字를 고치는 것에 대하여 온당치 못한 바가 있기에 三溪書堂 道會에서 이에 대한 문제를 발의하여 의논 하였으며, 당시 자리에 참석했던 퇴계의 本孫 및 수많은 양반들이 모두 이에 찬성했던 것을 근거로 들면서, 퇴계선생의 諱字를 충재의 자손들이 사사로이 고친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러한 논의를 거친 후 1년 정도가 지나서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本府에서 허가를 받고, 三溪書堂에서 爬錄한 후 板에 글자를 새길 때까지 유림들 각각의 정성과 재물의 부조가 있었지만 결코 ‘退溪’라 한 것이 온당치 못하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通章을 보내어 이 板을 찍어서 세상에 반포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하자, 이에 대해서 여러 僉尊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린 것이다. 이후에 다른 문집에서도 퇴계의 諱字를 고친 사실과 이러한 일들에 대한 일관된 규정이 없는 것을 말하며 자신들이 改書한 이번 일이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한편으로는 퇴계영남내의 위치를 의식하고서는 자세를 낮추어 자신들의 행동에 온당치 못함이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은 퇴계를 존경하는 마음이 모자라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결국 이 사건의 결론은 알 수 없지만, 현전하는 1930년에 간행된 『冲齋集』에는 ‘退溪 李滉’이라고 改書한 것이 수정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이후 영남의 鄕戰은 향론의 분열에 따른 씨족과 문중을 중심으로 한 유림간의 대립이 크게 작용하였다. 영남의 사족들은 공동의 이해가 걸린 문제에는 공동보조를 취하였지만, 한편으로는 각 가문의 이해가 상충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院祠나 鄕校를 기반으로 하여 향론을 결집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이 문서는 봉화酉谷에 살던 충재의 후손들이 삼계서당을 중심으로 향론을 결집하여 인근 고을에 자신들의 대변하던 것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서 鄕戰과 관련한 사례연구에 도움이 된다.
冲齋集』은 후손 權霂權濡 등이 金秋吉南亨會와 함께 士林에서 傳誦되는 것과 家藏日記에서 詩文을 수집하여 本集을 만든 후, 이미 撰定된 年譜를 권수에 두고 褒錫之典과 讚慕한 詩篇을 부록으로 엮어 洪汝河의 序文을 받아 1671三溪書院에서 간행(2권 1책)하였다. 그 후 李棟完權斗經이 詩文을 追入하여「拾遺」를 만들고, 부록을 증보ㆍ刪削한 후 權斗寅의 識를 붙여 1705년(4권 2책)에 간행하였다. 특히 權斗經이 지은「交遊錄」은 저자와 교유한 61명의 약전으로 중간본에만 실려 있다. 三刊本은 6대손 權萬이 遺稿와 家藏本『冲齋日記』를 11권으로 편차하여, 李光庭과 함께 간행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졸하였다. 이에 후손 權薲이 여러 宗人과 함께 權萬이 손수 편집한 일기를 대조ㆍ토론하고 아울러 士友의 의론을 채집하여 이광정의 序를 받아 1752년(9권 5책)에 간행하였다. 위의 通文에서 문제된 것은 四刊本으로서 1929년을 전후한 시기에 重刊에 대한 논의가 이뤄진 후 1930봉화삼계서원(10권 6책)에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실록에서 발췌한 啓辭 24편 및 疏ㆍ箚ㆍ奏議와 私藏에서 얻은 咏歸詩 1편, 或人書 1편, 邊公墓誌를 本集에 增編하고, 실록과 교유인의 연보 등에서 새로운 사실을 종합하여 年譜를 증보하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嶺南學派의 形成과 展開, 李樹健, 일조각, 1995.
인문과학 14집, 李樹奐, 경상북도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1997.
冲齋集, 權橃, 驪江出版社, 1985.
이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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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봉화(奉化) 삼계서당(三溪書堂)에서 보내온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凡我圓冠方領孰不知尊退溪先生爲先生哉冲齋先生亦國朝大賢也今僉尊知尊退翁而不知退翁之尊冲翁雪翁烏川金
公書曰老先生之於先祖以年輩以德業以爵位俱在所尊敬於精舍題詠猶謹書鄕貫姓名云云㞦在靑巖公摳衣之日手揭師門姓諱至
于今三百餘年未聞有未安於退翁者今於文集重刊附錄中改書退溪先生諱字不甚未安故發論於本堂道會之席而僉議莫不
可之退翁本孫數君子亦據席而定論者則豈曰冲翁子孫之私自改定乎其後一年之頃定頓篇帙繕寫正本許可于本府爬錄于溪堂
至鏤板前後僉尊各效誠力以財助相以躬練問未嘗有一言未安於退溪矣今者忽投通章以爲㞦冊斷不可施行於世世間文集行世與否盡
在 僉尊手分中容易事則圃隱一蠧聾巖溫溪諸先生文集亦改書先生諱字者 僉尊果能一一歸正乎且示喩淵源錄非一人一家之書也先儒所
記述無所有碍至於文集乃私家書冊也其附錄中諸篇皆作者之乎書姓名以致敬之則文集與淵源錄不可一例以爲證也諸家文集生等
不能廣攷然惟某某某集書先生又某某某集亦多書諱或號或貫鄕官啣不一其規未可舊例以是證則今以兩先生平日相處之禮者有何大
悖於義乎生等妄改舊本實無未安於先生又非薄於尊慕之誠心也惟 僉尊俯諒焉千萬幸甚
右 通 通
英陽鄕校
辛未三月二十六日 三溪書堂會中 柳厚根
權璥夏
權一淵
柳善根
權尹夏
張度鎭
權相黙
權哲淵
權濟淵
權晟夏
琴秉五
柳 潭
權翊淵
黃基勉
金永燾
權台燮
柳 瑀
權肯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