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궁내부 특진관趙秉式이 영양향교(英陽鄕校)에 보낸 통문(通文)
내용 및 특징
1903년 宮內府特進官趙秉式이 英陽鄕校에 내린 通文이다. 鄕校에서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 할 綱常 倫理, 風俗 등을 올바르게 잡아 敎化해야 하는 기본적인 의무를 강조하고 있다. 당시 구미열강이 서로 앞다투어 大韓帝國으로 진출하는 상황이 전개되면서 백성들은 厚生의 상업을 추종하기에 이르렀고 선비들도 私事로운 이익에만 쫓아간다고 지적하고, 외국의 宗敎가 풍속과 뒤섞여 혼탁해졌다고 꼬집고 있다. 이에 鄕校에서는 앞선 의무를 성실히 실행하기 위해서 교화의 의무를 다해 줄 것을 언급하면서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12명의 約長과 다음과 같은 세칙을 시행해서 경내의 많은 이들로 하여금 이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통문을 돌린다고 하고 있다.
개항이후 近代社會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향교는 신문화와 신문물의 도입에 역행하며 斥邪衛正의 최후의 보루를 자처하였다. 특히 향교는 書院毁撤 이후 그 영향력을 상대적으로 강화하면서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복고적인 이데올로기의 지향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므로 향교는 반봉건적인 근대의식의 성장에 역행하여, 西勢東漸의 민족적 위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역량을 배양할 수 없었다. 朝鮮後期로부터 韓末을 거쳐 일제의 식민지 상황하에서 경상북도의 향교도 위와 같은 일반적인 상황에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儒敎的 傳統이 강했던 지역적 특색으로 말미암아 유가적 이념에 충실한 보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封建과 反封建, 開化와 보수의 대립, 갈등 속에서 경상북도 향교의 위상은 양자가 지향하는 가치의 상반을 조회시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영양 영양향교에 아래의 절목을 첨부한 통문이 내려진 것이다.
일, 風俗은 날로 변하고 紀綱은 퇴색되었으니 조정의 백성을 교화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고자 하는 政策을 펴는 바, 『孔夫子行蹟圖』를 널리 배포하고 이를 보는 것 자체만으로도 聖賢의 숭고한 가르침의 뜻을 알게 해주는 길이니 만큼 자주 面對하여 학문적 추구도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모든 일에 도움이 된다고 여길 것.
일, 孔子의 평생의 행적을 그림과 간단한 서술로 나타낸 책인 孔夫子行蹟圖는 공자의 76世孫인 孔在憲이 中國에 들어가 구해왔으므로 (1901년) 이를 가져다 학문의 깨달음에 있어 도움이 되게 하고 모든 일을 치르는 데 있어 참고하라 함.
일, 孝를 장려하고 風俗을 돈독하게 하며 紀綱을 바로 세우고 名分을 가지런히 하는 鄕約을 각 郡 별로 만들고 이를 서로 권장하는 비를 세우고, 반대로 이에 반하는 것들은 없애라 함.
일, 향약은 藍田 呂氏, 朱夫子백록동, 栗谷先生의 石潭 鄕約에 의거해서 節目을 정하여 배포할 것.
일, 五倫行實을 보급해서 儒賢들의 말과 행동을 모아서 강상 윤리를 바로 잡고 학문의 根本을 정립하여 忠孝와 義, 烈을 행한 선비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을 구별하여 향교의 역할에 적절히 이용하여 기록할 만한 것은 전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추려낼 것.
일, 各 府, 郡, 邑에서는 新羅, 高麗 시대 이후 이름 있는 忠, 孝, 烈, 義의 志士의 史蹟을 파악하여 기록으로 만들 것.
일, 鄕約을 관장하는 이들은 境內의 忠, 孝, 烈, 義의 유현들의 이야기를 鄕約의 節目으로 만들고 그 비를 세우고 관리할 것.
일, 鄕約을 정하였으면 境內의 縉紳士林들에게 전하고 大小民들에게 細則을 전파하여 즉시 시행할 수 있도록 하게 하고 이를 널리 보급할 수 있게 할 것.
특히 고종 40년 (光武 七年) 11월 14일조를 보면 從 2品 金昌烈 등이 丁亥年(1887)에 고종이 경주군의 味鄒王, 文武王, 敬順王(미추왕은 박씨와 석씨가 넘겨준 王統을 이어받아 德으로 정사를 하고 禮義로 교화를 펼쳐 밝은 문화를 열어 놓았으며 소로 밭가는 법을 가르쳐 백성들의 힘을 덜게 하고 殉葬을 금지하여 - 실제론 지증왕 때 牛耕法과 殉葬法을 폐지 - 그 은덕이 두루 미쳤고, 문무왕은 疆土를 넓히고 고구려와 백제를 통일하여 온 세상이 그 위엄을 두려워하였으며 백성들이 생업을 즐겼고, 경순왕은 天命을 분명하게 알고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나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면하게 하고 고려 왕종에서 賓客의 대접을 받았으니, 지극한 공덕으로 백성들이 지금도 잊지 않는 왕이라 함) 세 임금을 ‘숭혜전’에서 함께 제사지내도록 한 것이 甲午年(1894) 이후 祭祀가 거의 끊어지고 봉분은 내려앉고 殿閣은 무너져 탄식을 금할 수 없다하며, 內部로 하여금 이미 시행하였던 規例대로 하도록 처분을 내려달라고 한다. 이에 고종은 地方官吏로 하여금 특별히 申飭하여 수호하라고 명하는데, 節目 조항 또한 그에 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 당시에는 新式學校의 設立으로 인해 전통적 교육 기능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地方의 鄕校의 입지가 불안정하였는데 실질적인 近代로의 이행의 過渡期적인 단계였던 만큼 향교가 담당해야 할 순기능적 의무가 완전히 배제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러한 상황은 향교가 지향해야 할 방향성을 흐트러뜨리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 통문은 그러한 상황에서 향교가 담당해야 하는 의무를 제 강조함으로써 지방에서 만연되고 있던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民亂 등에 대해 대비하고 지방의 윤리 교화의 기능을 하는 향교를 지배체제 하에 두려는 의도에서 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료적가치
통문이 내려진 당시의 상황은 구미열강으로부터 겉잡을 수 없이 밀려들어오는 외세의 文物, 文化, 思想들이 최고조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태였다. 조정에서는 친 일본적 성향을 가진 인사와 친 러시아적 성향을 가진 인사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고, 지방에서는 盜賊이 들끓고 反亂의 움직임도 일어나는 등 국가의 안위 전반에 걸친 위기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방의 이념적 토대인 향교에 통문을 내리면서 鄕約을 정비하고, 지방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한 중앙관료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신식학교의 설립으로 인한 개화사상의 도입으로 인한 사회적 이념의 와해가 국가 안위의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향교의 윤리적 부분을 강조하여 지방사회를 국가 지배체제 하에 두려는 의도가 보이는 자료라고 하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高宗實錄』권42,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