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軍威鄕校에서 柳溪堂先生의 『全禮類輯』의 발간비용을 갹출해 주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英陽鄕校로 발송한 通文
내용 및 특징
1899년 8월 28일 軍威鄕校에서 英陽鄕校로 보낸 通文이다. 溪堂先生은 학문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어 위로는 禮儀 經書와 그 해설서를 網羅하고 아래로는 東賢의 正論을 추려 요약한 것을 모아서 『全禮類輯』을 발간해서 禮學의 大家로서 後學에게 가히 모범이 될 만하다라고 칭송하면서 그 책이 30년간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後生들의 책임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鄕校의 많은 諸公들에게 처음으로 논의할 것을 발의하는데, 책을 내는 데 있어 자금을 모으는 것 보다 어려운 일은 없는데, 생각해 보건데 여러 儒生들이 약간의 財物을 醵出해서 그 비용을 마련하는 방법이 가장 적합한 방법이 될 것 같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리고 嶺南지역에서 溪堂선생에게 직, 간접적으로 학문적 은혜를 입지 않은 자가 없으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재차 강조하면서 간곡히 부탁하건데, 모두가 協心하고 각자가 특별히 노력해서 기한 안에 尙州로 돈을 보내주면 책을 발간하는 데 있어 더한 수고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이 官에서 이 文書에 더하여 전달하는 바가 있다. 排錢 一百兩을 거두어 준다는 글인데, 鄕校에서 이를 시행하는 데 앞서 結과 布의 정확한 양을 정해서 갹출하되 그것이 불분명할 때에는 처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면서 문서의 끝에 이러한 글을 첨부하니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 한 치의 오점도 남기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쓰라고 덧붙이고 있다.
鄕校의 財政的 基盤은 국가에서 지급된 土地와 奴婢였다. 물론 鄕校에 따라 재지사족의 寄附金이 보태어 지는 경우도 있었고, 심지어는 재지사족의 出捐에 의해 초창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답과 노비가 계속 유지되는 경우는 극히 적었고 개항 이후가 되면 재정적 기반의 폐단은 한층 심화되고 있다. 鄕校 내부적으로 전답과 노비의 유지와 관리에 많은 문제점이 있어서 鄕校田畓은 관리를 담당하는 校任들의 私有化, 弄奸 등으로 재정적 기반으로서의 역할을 다 할 수 없게 되었고, 奴婢는 遊離 등으로 향교의 경제적 역할을 다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더하여 1895년 이후 향교전답은 근대적 교육을 위한 公立小學校의 재원으로 편입되어 갔다. 英陽鄕校 또한 이러한 현상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1898년에 英陽鄕校로 내려진 下帖을 통해서 대략적인 상황을 볼 수 있다. 1895년에 반포된 敎育詔勅은 신식교육을 국가교육의 새로운 방향으로 삼아 전국에 공립소학교의 건설을 지시하였고 學部에서는 부족한 건설비용을 鄕校 소유의 土地에서 財源을 출원하기로 했는데, 1898년에 英陽鄕校로 내려진 下帖에서 鄕校의 2년간의 수입의 절반인 100냥을 신식학교 설립 경비로 지원하고 나머지 100냥을 享祀비용으로 쓸 것을 지시하는 내용의 하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렇듯 鄕校의 재정적 기반이 악화일로로 걷게 되는 상황에서 軍威鄕校에서 발의된 『全禮類輯』 발간 비용을 보태라는 내용의 通文은 官에도 전달되어 官에서 100냥을 보태었다는 사실도 담고 있다.
溪堂 柳疇睦은 西厓 柳成龍의 9世孫으로 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류후조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로 부사이재연의 딸이다. 1842년 향시에 합격했으나 회시에서 科場의 부정을 목격하고는 상주 시리에 溪堂을 건립하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성리학과 예학, 역사학, 보학에 두루 통달했으며, 문장과 서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는데, 『全禮類輯』은 사례(四禮), 오례(五禮), 사상례(士相禮), 거가잡의(居家雜儀)를 두루 참고해 완성한 예학의 집대성이었다. 이러한 서적이 30년 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으므로 상주로 발간할 수 있는 비용을 각처에서 보내온다면 여태껏 발간하는데 부단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모두의 도움으로 해결될 수 있으니 英陽鄕校에서도 이를 반성하고 도움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달한 문서라고 하겠다.
자료적가치
新式學校의 건립과 더불어 신식교육의 확대로 인해 鄕校의 교육적 기능이 위축되는 시기에 禮學으로 향교의 교육적 기능을 부각시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논의된 『全禮類輯』의 발간에 있어서의 재정적 확충을 위해 발송된 통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향교의 통문에 관에서도 관심을 가져 재정적 도움을 주려했고, 금액을 산정하는 데 있어서 적법한 절차와 규정을 마련한 상태에서 시행하라고 강조하는 점은 鄕校의 재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적법하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관청의 충고가 덧붙여 진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윤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