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폐지의 위기에 있는 修好稧의 修理를 위하여 稧會를 알리는 글
내용 및 특징
우향계은 李增이 안동으로 낙향하여, 1478년에 학덕있는 안동의 선비 12명(안동권씨 3명·흥해배씨 4명·영양남씨 4명·안강노씨 1명)과 함께 조직한 것이다. 이 우향계는 외지에서 들어온 사족의 후예들이 안동출신 사족들과 연대하여 결속하면서 친목을 도모하고자 한 것에서 시작되었으며, 후손들에 의하여 여러 명칭으로 이어졌다. 이들 13인이 우향계를 조직한 뒤, 이증의 아들 李浤이 그의 아우, 매부 및 다른 회원의 손자, 사위 등 15명과 함께 ‘眞率會’를 조직하였으며, 이굉의 서자 李側이 아버지의 비음기에 진솔회를 결성한 사실을 기재하였다. 이 진솔회가 만들어진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진솔회원인 이굉의 신도비에 의하면 1513~1516년 사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처음 우향계를 만들었을 때는 5개 성씨가 참여하고 있었지만, 이중 흥해 배씨와 안강 노씨가 보이지 않고 청주정씨 2명, 안동김씨 2명, 반남박씨 1명, 능성구씨 1명 등의 인물이 새롭게 보인다. 충재종택에 소장된 우향계축에서 權萬은 이들 정, 김, 박, 구씨가 우향계축의 외손이라고 하였다. 결국 이 진솔회는 友鄕稧員들의 후손들로 구성되어 전승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솔회에 이어서 1702년 10월 28일에는 우향계의 후손들 중 안동권씨 10명, 고성이씨 1명, 흥해배씨 1명이 연명하여 11월 10일에 계회를 개최함을 알리는 回文을 돌렸다. 그 결과 11월 10일에 60여 명에 이르는 계원들이 우향계와 진솔회의 계승을 표방하며 천등산봉정사에 모여 世好稧로 계의 명칭을 변경하고 총 9개조의 규약을 의결하여 정하였다. 1703년에 작성된 世好稧案에는 진솔회의 모임과 관련해 의결된 9개조의 규약과 당시 집회에 참석하였던 87명의 명단이 나오고 있어서 주목된다. 처음 봉정사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는 62명 이었다가, 1년 후에 25명이 늘은 것은 이후부터 계안에 명단을 추록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들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안동권씨 57명, 영양남씨 7명, 고성이씨 5명, 흥해배씨 5명, 청주정씨 3명, 안동김씨 1명, 전주류씨 3명이 있다. 이중 전주류씨는 안동권씨의 외손 자격으로 참가하고 있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처음 우향계에서 시작한 5개 성씨 중 고성이씨, 안동권씨, 흥해배씨, 영양남씨만이 남아있으며, 중간에 반남박씨, 능성구씨, 안강노씨가 빠져있다. 각 성씨들 간에도 우열차기 극명히 나눠지고 있는데, 처음의 우향계 때와는 달리 실질적인 모임의 주체와 운영은 안동권씨 일문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이들의 거주지는 녹전동가야리, 북후면도촌리, 신세동법흥리, 예천용문면저곡리, 봉화금계리 등으로 안동과 그 인근에 살고 있었다. 1865년에 와서 세호계는 시대적 상화에 맞춰 새롭게 정비되었다. 처음 계가 만들어져 수백년이 흘러 지금에 이르러 계회가 폐할 위기에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옛날의 성세를 찾기 위하여 새롭게 음력 5월에 길일을 정하여 모임을 갖고자 한다고 하였다. 이 회문은 고성이씨와 안동권씨 집안에서 공동발의하여 1월 10일자로 발송하였다. 이후 추가 회문을 발송하여 장소와 주의 사항을 알렸는데, 천등산봉정사에서 집회를 하며 전과는 달리 각자 자금을 출자하여 집회비용을 부담하였다. 그 결과 1865년 5월 초1일의 집회에는 처음의 5개 문중 가운데 안동권씨 24명, 흥해배씨 3명, 고성이씨 12명, 영양남씨 6명 등의 후손 45명이 모였다. 이들은 계의 명칭을 修好稧로 변경하고 매년 문중별로 돌아가며 모임을 가졌다. 이번 모임에는 외척들이 참석하지 않고, 안동권씨의 참여가 두드러지지만 고성이씨, 영양남씨의 참여비율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 수호계는 최초의 우향계 모임으로부터 7주갑이 되던 1898년 계회는 안동권씨 능동재사에서 98인이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계회의 장소는 안동 권씨의 靑城書院, 松坡齋舍, 酉谷齋舍, 陵洞齋舍, 영양남씨의 南興齋舍, 고성이씨의 伴鷗亭, 흥해배씨의 嘉水川齋舍 등에서 열렸으며, 사찰의 경우에는 봉정사, 西嶽寺, 雲臺寺, 孤雲寺, 廣興寺 등을 이용하였다. 이 수호계는 1903년 광흥사에서 가졌던 모임까지 39년간 유지되었으나, 끝이나고 근래에 들어서는 처음의 이름은 우향계로 회복하였다.
자료적 가치
‘友鄕稧帖’은 당초 ‘우향계축’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승한 ‘진솔회'와 ’세호계‘ 및 ’수호계‘까지 400여 년간 당초 회원 13명의 내외후손들이 그때 그때 선조의 유지를 받들어 확대 재결성하고 모임 때마다 회원들의 송시첩을 잘 정리해 놓은 책자로서 1478년에 작성된 우향계가 어떻게 계승· 발전해 왔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조선시대 계회의 변천사례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충재종택, 『友鄕契軸』(보물 제896-1호) / 안동민속박물관,『友鄕稧案』, 시도유형문화재 제327호.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7.
『安東의 契』, 安東民俗博物館 編, 安東民俗博物館, 2006
이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