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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완의(完議)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XD.0000.4723-20100731.Y1010417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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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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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증빙류-완의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완의
작성주체 영천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형태사항 크기: 39 X 57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천 영천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천 영천향교 / 경상북도 영천시 교촌동

안내정보

갑인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완의(完議)
갑인 년에 영천향교에 소속되었던 노비득매(得每)가 사망하면서 10세가 넘은 아이와 3-4세 된 아이를 향교에서 수용하기 곤란하였으므로 이들을 팔고 대신 다른 노비 2명을 사겠다는 공론을 정하고, 영천군에 그 내용을 알린 완의(完議)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慶尙北道, 1991
民族文化硏究所,
남민수

상세정보

갑인 년에 永川鄕校에 소속된 奴婢得每가 죽었으므로 그의 두 아들을 팔고 다른 노비를 사겠다는 결정을 永川郡에 알리는 完議
내용 및 특징
朝鮮시대 초기에는 學田과 奴婢가 鄕校의 주요 재정적 기반이었으나 朝鮮시대후기에 이르면, 學田의 감소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奴婢 역시 죽거나 도망하는 者의 숫자가 급증하면서, 鄕校의 재정보충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鄕校의 奴婢는 국가가 지급한 것이므로 마음대로 팔아서 처리할 수 없었고 鄕校구성원의 公論을 거쳐 반드시 官의 허가를 얻어야 했다, 본 문서를 살펴보면, 奴婢得每가 사망하면서 그의 두 아들이 남게 되었는데, 鄕校에서 이들을 需用할 수 없으므로 이들을 放買하고 代奴 2人을 구하겠다는 公論을 정하였으며, 관청에 이러한 결정내용을 알렸다. 임고서원도본서원송곡서원등의 有司들이 서명을 하고 있는 것은 이 결정이 一鄕의 公議에 따른 결정이기 때문이다.
자료적가치
朝鮮시대후기에는 鄕校奴婢가 鄕校財政의 확보를 위해 큰 힘이 될 수 없었음을 입증하는 문서중의 하나이다. 이처럼 먼 곳에 있는 奴婢는 관리하기도 힘들었고 死亡 기타 사유가 발생하면 더더욱 관리하기가 힘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民族文化硏究所,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慶尙北道, 1991
民族文化硏究所,
남민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갑인년 영천향교(永川鄕校) 완의(完議)

完議
完議事浦項居校婢得每之子
兄弟或年過十歲或不滿三四歲三
口不但在於遠地難於待年使喚春間
其母得每身死無所依庇流離之患非
朝則夕殆同等案之物况今校勢蕩竭
需用無策故玆因大享一鄕士林齋會
之日從僉議依前例放贖捧價如干買置
代奴二口其餘則以爲校用萬一之資禀官
成完議事
甲寅八月初一日鄕校都有司
掌議

臨皐院長
道本有司
松谷院長
有司

立巖有司
滄州有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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