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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경주군 하첩(下帖)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2+KSM-XC.1919.4713-20100731.Y1010105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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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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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첩관통보류-첩
내용분류: 정치/행정-명령-첩
작성주체 경주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작성시기 1919
형태사항 크기: 20 X 29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경주향교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경주향교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7-1

안내정보

1919년 경주군 하첩(下帖)
1919년 경주군수(慶州郡守)가 각지의 향교에서 다투어 금품을 모금하는 등의 행위를 하니 이를 자제해 달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하첩(下帖).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

상세정보

1919년 경주향교등 각지의 향교에서 기부금을 요구하는 일이 잦으므로 경주군수가 이를 자제할 것을 지시하기 위해 내린 下帖
내용 및 특징
1919년 경주군수경주향교直員에게 근년 염치를 모르는 향교의 원장들이 갖은 수단을 써서 돈을 모금하고 거두므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으니, 각 향교의 원장은 수시로 기부를 모금하는 행위를 삼가는 것이 좋겠다고 下帖을 내렸다. 1919년의 향교는 이미 總督府의 직접적 통제를 받는 기관으로 변모하였고, 향교의 재임들 역시 이미총독부의 시정명령에 영합하는 자들이 임명되었다. 이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열악하던 향교의 경제형편은 더욱 어려워지고 도덕을 선도하기는 커녕, 온갖 문제가 터져 나왔다.
자료적 가치
1919년은 일본군국주의자의 포악한 정치가 극에 이르렀던 한 해였다. 이 때문에 경주향교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유림들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었으며 그들이 말하는 忠烈의 의미는 예전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남민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19년 경주군 하첩(下帖)
下帖鄕校
右爲帖諭事凡章甫於身者通稱
謂之士而士之實不在乎章甫在乎孝
弟忠信禮義廉恥也惟我東都古稱
鄒魯儒賢輩作出焉而奮忠敦義處
焉而修道立敎故子弟於鄕黨者能入
孝而出恭章甫於校院本亦崇廉而
尙恥矣然而世級漸下恐墜綱紀實足
識者之所憂慮也料外年前自玉山
書院偶迎外鄕院長而卒入紛競之風
以何通文一事轉生開金層節不啻
以朋友而排斥竟至以親戚而阻絶寧不慨
惜哉所執假使兩是區竟未免雙非其在
首善之所胡不汲汲解決玆以帖諭到
卽翻通各門不日會集于該院以爲妥
協保合之地宜當事
右下文廟直員 此准
大正八年九月十六日
慶州郡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