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에 英陽郡守가 成均館과 學部의 훈령에 근거하여 英陽鄕校에서도 經義考試를 치를 것을 지시한 下帖
내용 및 특징
1900년에 英陽郡守가 學部訓令에 의거하여 成均館長李鍾元이 출제한 經義問題를 鄕校에 내려 보내어 이 문제에 근거를 두고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이 對策을 지어 올리도록 지시한 下帖이다. 주지하다시피 大韓帝國 시기의 교육정책은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를 안고 있었다. 가령 科擧制度는 1894년에 폐지되었으며, 實用에 쓸 수 없는 虛文으로 官吏任用을 할 수는 없다고 宣言한 바 있다. 그러나 1894년 최초의 學務衙門大臣이 되었던 朴定陽은 小學校와 師範學校 등 新式學校의 건설을 천명하면서 그 교육목적으로는 儒敎的德目을 갖춘 人才의 양성을 거론하고 있다. 1896년 학부대신이 되었던 申箕善은 아예 儒敎의 理念을 실천하는 것을 開化敎育인 것처럼 강변하였고, 1899년에 발표되었던 高宗의 綸音에서도 역시 서구에 기독교를 사회도덕으로 여기듯이 儒敎를 宗敎로 숭상하라고 하여, 儒敎理念을 近代敎育의 倫理目的으로 여겼던 것이다. 본 문서 역시 이러한 과도기적 혼란을 보여주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1894년에 이미 공식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899년에 式年에 한번 經義問題를 各郡의 鄕校에 출제하고 文士들이 對策을 지어 올리도록 하라는 행정명령이 내려졌던 것이다.(물론 이는 성균관과 각 향교에 국한한 명령이기는 하다.) 본 문서에 의하면 이런 방침에 따라 經典의 의미를 묻는 30개의 문제를 下帖과 함께 동봉하여 各鄕校에 발송하였다.
자료적 가치
서구의 근대교육제도를 大韓帝國 敎育의 根本으로 전환하게 된 이상, 鄕校의 존재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고 예전의 位相은 잃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王室은 새로운 교육제도를 여전히 王室에 충성하는 臣民을 양성하는 제도로 만들고자 했고, 이점에서 말하자면 儒敎理念은 여전히 일정정도의 효용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근대 교육이 실시되고 있는 마당에 成均館과 各郡에서 文士들이 經典의 이해 정도를 묻는 經義對策考試를 실시했다는 것은 近代敎育 도입시의 여러 가지 모순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1.
남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