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0년 英陽鄕校의 執綱이 향교공사에 있어 이미 결정된 각 門中의 비용부담을 독촉해 줄 것을 縣官 요청한 牒呈
[내용 및 특징]
1880년 初4日 英陽鄕校의 執綱인 趙가 縣官에게 올린 牒呈이다. 牒呈의 내용은 鄕校의 공사비의 일부를 각 門中이 부담하기로 했지만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으로 이에 대한 시정을 바란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이러한 牒呈에 대해 縣官은 門中의 이러한 행위는 잘못되었음을 밝히고 속히 조치를 취하고 또다시 예전과 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때 다시 보고를 하라는 題音을 내리고 있다.
조선후기 鄕校의 修理나 重建, 또는 移建과 같은 공사는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였기에 官의 보조 뿐만 아니라 각 門中 또는 各邑 儒生들이 갹출하여 공사비를 보조(儒錢)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儒生 및 門中들은 비단 鄕校의 공사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鄕校의 財政基盤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鄕校가 그들의 활동장소이고 그들의 이해를 대변해 주는 鄕村機構였기 때문이었다.
위의 牒呈의 경우에도 英陽의 각 門中이 鄕校의 공사에 보조하기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양현에서는 자세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실제적으로는 門中이 보조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이로 인해 匠人의 보수지급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鄕校의 執綱이 縣官에게 이의 시정을 요구하였으며 縣官도 이러한 문제를 인정하고 이에 대한 시정을 명하였다. 그러나 縣官의 題音에도 불구하고 門中의 소극적인 보조는 개선되지 않았다. 이는 5일 뒤인 초9일의 牒呈에서 알 수 있는데 초4일 牒呈을 통해 시정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門中이 채무를 갚지 않음을 보고하였다. 당시 각 門中이 어떠한 연유로 보조에 소극적이었는지는 파악하기 어렵지만 당시 鄕校의 공사가 원할히 진행되지 못하고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문제가 발생되기는 하였으나 英陽의 門中이 鄕校의 운영에 개입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는 조선후기 향교가 門中 즉 在地勢力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운영되어졌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英陽鄕校의 운영 및 鄕校와 鄕中의 門中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후기 鄕校의 重修나 移建 등의 큰 공사가 있을 때에는 官의 보조 뿐만 아니라 儒生이나 門中의 보조가 일반적이었다. 英陽鄕校의 牒呈에서도 門中이 鄕校의 공사에 대한 비용을 일부 부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보조가 지연되어 문제가 발생하기는 하였으나 당시 鄕校와 門中과의 관계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즉 鄕校의 운영은 官의 독단적인 주도하에 있는 것이 아닌 鄕中의 士林 또는 각 門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鄕校는 단순한 국가교육기관이 아닌 在地勢力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운영되었던 하나의 鄕村機構였음을 위의 牒呈으로 파악할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1.
조선후기 향교연구, 윤희면, 일조각, 1990
유기선